모멸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폭력이며, 평생 가슴에 응어리를 남기기 일쑤다.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기억은 세상에 대한 증오 또는 자기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억울하게 수모를 당했다는 피해의식은 다른 집단에 대한 맹렬한 공격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심지어 인간 개인의 내면 그리고 사회에는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두운 심연이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모멸감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가장 큰 적이다. 모욕을 쉽게 주는 사회와 모멸감을 쉽게 느끼는 마음 모두 아주 위험한 것이다. 따라서 모멸감을 덜 느끼고 사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하지만 때로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모멸을 가하려는 의도가 없었음에도 낮은 자존감 때문에 스스로 모멸감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이 응당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과민하게 느끼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런 모멸감이 확대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어떤 정신적 충격이나 상처를 받은 후 나타나는 ‘격분장애’는 정신적 고통이나 충격 이후에 부당함, 모멸감, 좌절감, 무력감 등이 지속적으로 빈번히 나타나는 부적응 반응의 한 형태다. 격분 또는 울분이란 인간이 가진 독특한 감정 중 하나다. 즉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믿음에 근거한 증오와 분노의 감정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장애를 ‘격분장애’라고 말한다. 미국에서 흔히 발생하는 총격사건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 같지만, 이처럼 차별과 모멸감은 순간적으로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우리는 흔히 타인과 자기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비교해보면 자기와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는 잘못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습관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를 타인과 분리하고, 자기가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모멸을 서슴지 않는다. 자기와 타인을 구별하는 이분법은 다양하다. 나는 선하고 너는 악하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나는 똑똑하고 너는 멍청하다. 나는 유능하고 너는 무능하다. 나는 강하고 너는 약하다. 나는 예쁘고 너는 못생겼다. 나는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 이런 구분 속에서 스스로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고 상대방의 열등감을 자아낸다. 단편적인 잣대로 사람의 격을 나누고 자의적으로 가치를 매기는 과정에서 모멸감을 주고받는다.
사상체질을 창의한 이제마는 이런 차별은 우월이 아니라 다름이라고 풀이했다. 그의 아버지는 군수였는데 출장을 다녀오다 주막집에 말을 매고 주모와의 하룻밤 풋사랑으로 그를 얻었고, 이름을 제마(濟馬)라고 지었다. 그래서 그는 양반이 아니라 어중간한 중인(中人) 계급이다. 만약 어느 날 양반들만 모인 당상에서 모두들 양반다리를 하고 점잖게 앉아 있는데, 중인이 그 사이에 들어가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어 무례한 행동을 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소양인이 이런 광경을 목격한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입바른 말을 할 것이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너는 어느 집 자식이냐? 라며 모멸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양인은 그렇게 화를 내도 뒤끝은 없다. 소음인이 그런 행동을 본다면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만 하지, 말은 못하고 상황이 수습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를 무시한 처사라며 스스로 상처를 받는다. 태음인의 경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지만 행동으로는 표현하지 못하고, 머릿속으로 저놈의 아버지에게 일러 버르장머리를 고쳐줄까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끝까지 보복하려고 든다. 이처럼 모멸감에 대한 생각과 반응이 체질마다 다르다는 것이 사상체질의 근간과 철학이다. 각기 다르지만 어느 것이 우월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존엄보다 돈이나 다른 사회적 가치가 우선인 사회는 결국 어떤 모멸은 다른 모멸로 이어지고, 이는 자괴감과 수치심을 확대 재생산될 수밖에 없으며, 그 안에서 발생하는 분노는 자기나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표출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제마의 결론은 “잘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질투하는 것은 모든 병의 원인이고,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기는 것이 모든 병을 치료하는 약이다”라는 철학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