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ICT 업계의 판도가 복잡해지고 있다. 수십년 간 대립하며 으르렁거리던 기업들이 간단하게 연합하는 한편,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던 기업들이 새로운 시장에서 거칠게 충돌하고 있다. 올해부터 심해진 글로벌 ICT 업계의 판도변화는 내년 더욱 심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1월6일(현지시간) 인텔의 프로세서에 AMD의 라데온 그래픽이 들어갈 것이라고 보도했다. AMD가 인텔 타도를 외치며 라이젠을 출시한 것이 올해 초라는 점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소식이다.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의 최대 라이벌인 인텔과 AMD가 갑자기 뭉친 이유는 인공지능 기업으로 우뚝 선 엔비디아 때문이다. 엔비디아가 인공지능과 자율주행차 등 초연결 생태계에서 두각을 보이자 전통의 CPU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나선 인텔이 AMD의 손을 잡았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 사진=이코노믹리뷰 최진홍 기자

인텔은 애플과도 협력하고 있다. 아이폰4 전까지 아이폰의 모뎀칩을 개발했던 인피니온을 인수하며 애플과의 동맹전선을 구축했다. 자연스럽게 아이폰7까지 모뎀칩을 제공했던 퀄컴과는 대립각을 세우게 됐다. 시스템 반도체 시장의 판도 변화이자, 인텔의 유연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인텔 인사이드의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됐다는 말이 나온다.

최근 인텔과 퀄컴은 특허권 분쟁으로 소송을 치르는 등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블룸버그는 11월2일(현지시간) 애플이 지난 7월 퀄컴에 칩 기밀자료를 요구했고, 그 복사본이 애플과 협력하고 있는 인텔에 전달됐다는 이유로 퀄컴이 소프트웨어 특허계약 위반 소송을 걸었다는 소식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애플과 퀄컴 대립은 심해지고 있다. 올해 1월 애플이 퀄컴의 리베이트 사업이 불공정하다는 이유로 10억달러의 소송을 걸었고 퀄컴은 7월6일 애플을 특허 침해혐의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맞소송을 걸었다. 현재 퀄컴은 한국과 대만의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처분과 함께 독과점 조사를 받고 있으며 지난 11월 애플이 퀄컴에 특허 8건의 침해혐의로 소송을 걸자 퀄컴은 아이폰X의 미국 출시를 금지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퀄컴과 브로드컴의 인수합병은 일단 유보적이다. 브로드컴이 퀄컴 인수를 위해 1300억달러를 제시했으나 퀄컴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현재 브로드컴은 미국 사모펀드 실버레이크와 함께 퀄컴에 11명의 이사진을 추천하는 등 파상공세를 펼치고 있다. 브로드컴과 애플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우호관계이기 때문에, 퀄컴이 브로드컴에 인수될 경우 퀄컴과 애플의 대립도 끝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중론이다.

▲ 출처=픽사베이

최근까지 반도체 업계 전체는 '합종연횡의 전형'을 보여줬다. 2015년만 NXP가 프리스케일을 119억달러에 인수했고 현재 퀄컴은 NXP 인수를 추진중이다. 인텔이 알텔라를 167억달러에 손에 넣었고 아바고의 브로드컴 인수도 2015년 있었으며, 일본의 소프트뱅크는 2016년 영국의 암(ARM)을 318억달러에, 아날로그디바이스도 2016년 리니어를 160억달러에 인수했다.

구글과 시스코의 연합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WSJ는 10월25일(현지시간) 구글과 시스코가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클라우드 합종연횡을 단행, 아마존의 AWS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네크워크의 강자이자 실리콘밸리의 터줏대감이 구글과 만난 것은 클라우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아마존의 손을 잡았다. 9월30일(현지시간) 인공지능 알렉사와 코타나를 통합해 알렉사에서는 코타나를, 코타나에서는 알렉사의 기능을 이용할 수 있도록 협력했다. 아마존이 알렉사 에브리웨어를 통해 클라우드와 인공지능을 묶은 상태에서 MS의 기반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구글과 세일즈포스도 손을 잡았다. 클라우드 분야에서 함께 힘을 키워 서비스 인프라를 키우겠다는 의도다.

구글과 시스코, 아마존과 MS의 동맹에서 아마존과 구글을 따로 분리해 생각할 필요도 있다. 아마존은 올해 오프라인 신선식품 업체인 홀푸드를 인수해 전자상거래에서 '모든 상거래 시장'의 강자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존 오프라인 유통업체인 월마트를 중심으로 반(反) 아마존 연맹이 만들어졌다. 월마트와 홈디포 등 유명 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이 구글의 인공지능인 구글 어시스턴트 생태계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프라인 매장에 구글 어시스턴트가 탑재된 인공지능 스피커 구글홈을 비치하고 있으며, 아마존의 파상공세에 대비하고 있다.

아마존이 홀푸드 인수로 ICT 온오프라인 경쟁력을 체화하는 한편 MS와 협력으로 기반 인프라를 다지기 시작하자 구글이 월마트 등 오프라인 업체들을 새롭게 규합, 클라우드 시장에서 반격하는 분위기도 연출된다. 아마존의 시장 장악력이 커지자 구글이 아마존 외 유통업체들을 규합해 인공지능부터 클라우드까지 반격의 마지노선을 구축하는 셈이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미국 기업들이 아마존의 강력하고 공격적인 사업확장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모빌리티에서는 우버와 반 우버연대가 더욱 거칠게 충돌하고 있다. 소프트뱅크가 중국의 디디추싱, 동남아시아와 인도의 올라택시와 그랩택시에 지분을 투자하는 한편 우버 투자까지 타진하고 있다. 조직 내 성추문 등 갖은 악재에 시달리고 있는 우버가 최대한 소프트뱅크의 공격을 방어하는 분위기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재 소프트뱅크는 우버에 100억달러를 투자하는 컨소시엄을 이끌고 있으며 최근에는 우버 해킹 파문을 거론, 지분 매입 과정에서 인수가격을 30% 깎겠다는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우버가 소프트뱅크의 압박을 받는 사이 미국 현지에서는 리프트의 반격이 매섭다.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이 포함된 컨소시엄은 지난 6일(현지시간) 우버의 라이벌인 리프트에 5억달러를 투자했다.

원래 알파벳, 즉 구글과 우버는 동맹관계였다. 우버가 2009년 설립되고 2011년 본격적인 사업에 돌입한 후, 2013년 구글은 구글벤처스를 통해 2500만달러를 우버에 투자했다. 이 과정에서 데이비드 드루먼드 구글 부사장은 우버 이사회 멤버로 활약했다. 두 회사는 글로벌 ICT와 모빌리티 영역에서 강력한 시너지를 내기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구글이 자율주행차를 개발하며 우버와 거리를 뒀고, 결국 우버는 보란 듯이 서비스 초기부터 사용하던 구글맵을 버리고 독자 지도 서비스 개발에 착수했다.

현재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의 자율주행차 사업부문인 웨이모는 우버와 자율주행차 기술 유출로 세기의 소송도 벌이고 있다.

미디어 업계도 합종연횡의 바람이 거세다. 디즈니가 21세기폭스의 미디어 사업을 524억달러에 인수하는 메가딜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디즈니는 21세기폭스의 콘텐츠 역량은 물론 OTT 플랫폼 훌루의 지분도 추가로 확보하게 됐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휴 관계가 종료되는 넷플릭스와 플랫폼 진검승부를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12년간 디즈니를 이끈  로버트 아이거 최고경영자(CEO)가 앞으로 새로워진 디즈니를 이끌어 간다.

▲ 출처=픽사베이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의 망 중립성 폐지로 ICT 기업과 통신사의 관계정립에도 재편이 불가피하다. 다만 구글과 페이스북 등 거대 ICT 기업들은 의외로 망 중립성 폐지의 타격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17일(현지시간) “글로벌 ICT 기업들이 완전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며 "거대 ICT 기업들은 이미 확보한 기득권을 바탕으로 현상유지가 가능하지만, 새로운 스타트업은 망 중립성 폐지로 기존의 거인들을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내년 테슬라의 도전도 관전 포인트다. 전기차를 중심으로 에너지 기업을 꿈꾸는 테슬라는 최근 호주에 세계최대 리튬이온 에너지 저장시스템을 가동하는데 성공했다. 자율주행차를 중심으로 전기차 패러다임의 패권을 누가 가져가느냐가 관건으로 부상하고 있다. 중국의 BYD 등이 참전하는 배터리 전쟁도 눈길을 모은다.

미국과 중국의 ICT, 나아가 인공지능 경쟁력도 관건이다. 중국 정부는 조만간 미국과 함께 글로벌 2대 인공지능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복안이며, 구글은 중국 베이징에 인공지능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구글 클라우드(Google Cloud)의 수석 과학자 리페이페이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개발자 대회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기조연구에 집중할 것”이라면서 “학계와도 긴밀하게 협조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자업계도 격렬한 시장재편이 있을 전망이다. 반도체 슈퍼 사이클을 중심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강세가 예견되는 가운데 중국과 미국의 특허 침해 소송 가능성이 제기된다. 중국에서는 D램 가격 담합 의혹까지 제기하는 중이다. 디스플레이에서는 국내 기업과 중국 기업의 '물량 싸움'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 BOE는 현재 허페이에 건설 중인 10.5세대 공장의 양산 시기를 내년 1분기로 당겼으며 차이나스타(CSOT)는 오는 2019년 하반기 가동을 목표로 중국 선전에 10.5세대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스마트폰에서는 삼성전자가 1위를 유지하는 가운데 신진시장을 중심으로 중국 업체들의 약진이 예상된다.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는 올해 3분기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21.2%의 점유율로 1위를 달리고 있으나 11.9%의 애플이 불안한 2위를 기록한 반면 중국의 화웨이가 9.9%의 점유율로 바짝 추격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인도에서는 샤오미가 삼성전자의 뒤를 이어 2위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