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이 마무리되는 지금, 대한민국 재계는 꽁꽁 얼어붙었다. 그런 와중에도 온도차이가 있다. 삼성과 현대차는 울상이지만, LG와 SK를 비롯해 롯데는 상대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풍파의 재계

최순실 게이트로 시작된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후 촛불시위를 통해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다. ‘기업의 입’ 역할을 한 전국경제인연합회 위상은 크게 추락했으며 주요 오너들도 검찰의 수사를 받거나 구속됐다.

삼성그룹은 최순실 국정농단 여파의 직격탄을 맞았다. 이재용 부회장은 구속되어 항소심이 진행중이며 두뇌 역할을 하던 미래전략실도 사라졌다. 그룹은 사실상 해체됐고 각 계열사 각자경영은 엇박자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의 사장단, 임원인사도 이례적으로 늘어졌으며 계열사 인사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사업지원TF를 꾸리는 한편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계열사 각자경영 시너지를 일으키겠다는 복안이지만 아직은 요원하다.

최근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2년전 조치를 번복해 뒤숭숭하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공정위는 삼성SDI가 보유한 삼성물산 주식 총 904만2758주 가운데 500만주를 매각하도록 했다. 순환고리 출자 당시 소멸법인과 존속법인이 합병하면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순환출자 강화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21일 당시 순환출자 가이드라인 해석을 번복하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순환출자 형성으로 판단했다. 삼성이 두 회사 합병 당시 청와대에 로비를 했다는 정황이 폭로된 가운데 2년 전 판단이 잘못됐다고 본 셈이다. 김 위원장은 “반성한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삼성SDI는 늦어도 내년 9월까지 보유하고 있는 삼성물산 잔여 지분을 모두 처분하게 됐으며, 처분 주식 가치는 5000억원을 넘긴다.

삼성SDI가 삼성물산 잔여 지분을 모두 처분해도 이재용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에는 미비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은 삼성전자며, 현재 이 부회장의 삼성전자 지분은 0.65%에 불과하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의 지분 4.61%를 가지고 있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다. 가족 등 특수관계인 지분을 모두 더하면 40%에 이르기 때문에 삼성SDI가 처분하는 삼성물산 주식 404만주는 대세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지분율이 2.1%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보험업법 개정이나 금융그룹통합감독시스템이 단행되면 삼성생명이 가지고 있는 삼성전자 주식 8.19%를 매각해야 하기 때문에 이 부회장은 한 주의 삼성물산 지분도 아쉬워질 수 있다. 삼성이 이번 공정위 발표에 공식적인 코멘트를 내놓지 않으면서도 내심 당혹해하는 이유다.

진행되고 있는 이 부회장 항소심 재판도 부담이다. 공정위 순환출자 변경 발표 다음 날 열린 재판에서 재판부는 이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2014년 9월12일 독대를 추가해야 한다는 특검의 공소장 변경 신청을 허가했다.

1심 판결에서 인정된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의 독대는 2014년 9월15일, 2015년 7월25일, 2016년 2월15일 총 세 번이다. 여기서 2014년 9월13일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이 안가에서 독대했다는 것이 특검의 주장이며, 이 부회장 변호인단은 공소장 변경에 동의했으나 “기억에 없다”며 반발했다. 또 2014년부터 2015년 사이 삼성전자가 출시한 갤럭시S5와 갤럭시노트4를 의료기기에서 제외하는 문제가 삼성의 중요한 현안 중 하나였다는 특검의 의견서에 대해서도 반박하며 날을 세웠다.

총수 유고가 장기화하면서 삼성 내부 분위기는 어지럽다. 미국에 수출되는 세탁기를 대상으로 하는 세이프가드 발동 등 현안이 산적해 있으나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선택과 집중’이 전무하다는 지적이다.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 당시부터 준비하던 인수합병이 대부분 올스톱 상태인데다 삼성전자의 주력으로 부상한 반도체 사업도 불확실성이 커지는 등 어려움이 심해지고 있다”면서 “빠르게 조직을 추스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 상황이 악화되는 분위기”라고 답답해했다.

현대자동차도 혼란의 연속이다. 최순실 게이트 당시에도 불거진 일감 몰아주기 논란이 여전한데다 지주회사 전환과 관련된 특별한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는다. 노동조합의 파업 리스크도 여전한데다 실적도 떨어지고 있다.

이 외에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자택 인테리어 공사를 진행하면서 회삿돈 30억원을 유용한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고 있으며 효성 비자금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은 지난달 17일 효성 본사와 관계사 4곳을 압수수색했다.

롯데는 한 숨 돌렸다. 22일 신동빈 회장이 징역 1년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으며 그룹 운영에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롯데는 “판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면서 “임직원들은 더욱 합심하여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ICT 분야에서는 김정주 NXC 대표도 22일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법원 1부는 22일 진경준 전 검사장에게 뇌물을 건낸 혐의로 김정주 NXC 대표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한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을 깨고 무죄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은 뇌물의 대가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위기일발인 삼성과 달리 SK와 LG는 상대적으로 논란 무풍지대다. 최태원 SK 회장은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검찰의 불기소 처분을 받아 그 즉시 도시바 메모리 인수전 지휘를 위해 일본으로 날아갔고, 결국 SK하이닉스가 포함된 한미일 연합은 도시바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에 성공했다. 최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 방중 기간 경제사절단에 참여하는 한편 최근 사회적 기업 가치를 내세우며 재계 전반에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는 중이다.

LG도 무풍지대다. 일찌감치 지주사 전환을 통한 지배구조체계 확립에 나섰기 때문에 최순실 게이트 초기부터 큰 논란에 휘말리지 않았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첫 대기업 방문지로 12일 LG그룹을 방문한 바 있다.

두 회사의 앞 날도 당분간은 평온할 가능성이 높다.

김상조 위원장은 지난 6월 4대그룹 경영인과의 만남을 통해 “연말까지 기업의 자발적인 변화를 기다리겠다”면서 개혁을 위한 성과물을 요구했다. 11월 롯데가 추가된 5대그룹 경영인과의 만남에서는 “자발적 개혁에 의구심에 든다”는 말로 노골적인 압박에 나선 상태다.

공정위가 말하는 자발적 개혁은 지배구조개선과 관련된 현안이기 때문에 SK와 LG는 큰 걱정이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우선 두 회사 모두 지주사 전환을 이루며 지배구조개선과 관련된 정리가 끝났다. 10대 그룹 지주사 중 SK는 처음으로 주주가 총회에 출석하지 않고도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전자투표를 도입했으며 LG도 착실한 ‘공정위 모범생’으로 자리를 잡았다.

▲ (왼쪽부터) LG그룹 방문한 김동연 부총리, 구본무 LG그룹 회장

정치인들 기사회생

반(反) 기업 정서가 확산되며 재계 분위기가 얼어붙었지만, 정계는 때 아닌 봄이다.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이완구 전 총리는 22일 대법원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지난해 총선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던 이철규 자유한국당 의원, 김한표 자유한국당 의원, 김철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22일 대법원이 각각의 항소심 판결을 유지하는 확정 선고를 내려 의원직을 유지하게 됐다.

김경준 NXC 대표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았던 진경준 전 검사장은 22일 징역 7년, 벌금 6억원이 선고된 원심이 파기되며 다시 재판을 받게 됐다. 앞으로의 재판 과정에서 형량이 다소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