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평안도순찰사 이원익, 순변사 이빈 등이 새로 임명되었는데, 감사 송언신과 병사 이윤덕이 적병을 무서워하여 산 속에 숨었으므로 파면되고 이원익과 이빈은 강변포수(압록강변)와 합세하여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순안으로 오고, 별장 깅응서는 용강, 삼화, 증산, 강서읍의 군사를 거느리고 20여 병영을 지어 평양 서쪽에 진을 치고 황해수사 김억추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하류에 있어 기각(掎角之勢=기각은 한손으로 그 뿔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 발을 비튼다는 뜻으로 기각의 세는 양쪽에서 협공하는 것을 의미)의 세를 이뤄 양쪽에서 응하기로 하였습니다.”

“음! 기생도 좋은 일을 하면 충신이나 다름없다. 평양부 기생 계월향은 어떤 적장에게 잡혀 도망하지 못할 줄 알고 김응서를 자기의 친형제라고 적장을 속여 성안으로 불러들인 다음 잠든 틈을 타 김응서를 시켜 그 적장의 목을 베고 계월향도 자청하여 김응서의 칼에 죽어 버렸고, 김응서는 밤에 성을 넘어 적장의 수급을 조정에 올리고 방어사가 되었다고 한다.”

“네, 당시의 소서행장은 평양에 웅거한지 여러 날이 되어 원병을 다시 충원하여 중국까지 들어가기로 작정하고 한양에 있는 총대장 평수가(平秀家=당시 일본군 총대장으로 宇喜多秀家우키다 히데이에를 지칭)에게 수륙으로 증원하여 주기를 청하니, 수가가 답하기를 바다를 건너 명나라를 쳐서 다행히 승전 한다 하더라도 이순신의 수군을 이기지 못한 지금에 가벼이 압록강을 건너갈 수는 없다하며 아직 평양을 고수하고 있다가 일본 수군이 이순신의 수군을 없애버린 뒤에 수륙군이 합세하여 멀리 말을 달려 함께 나아가는 것이 만전의 방책이라고 말하여 고니시는 그날부터 수군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하하! 일본 놈들도 본대와 멀리 떨어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구나! 1592년 9월 6일, 팔월 초하루 戊子일에 이원익이 주장이 되고 이빈과 합세하여 평양성 북쪽까지 진격하였으나 적의 대군이 몰려나오는 것을 본 이원익은 군사들을 놔두고 달아나 버리니 아군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직 강변포수들은 단독으로 싸워 적군을 수없이 죽이고 모두 다 전사하였다.”

“네, 군의 지휘관이 먼저 도주하는 것은 사실상 군인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김응서는 싸움이 시작되는 것을 보자 군사를 끌고 보통문으로 쳐들어왔으나 때가 늦어 이원익의 군사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분개하여 고군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이라 거의 전군을 잃고 도주하였습니다.”

“음! 임진왜란 당시에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하는 장수보다 그나마 조금은 낫다고 본다. 순찰사 이원익의 군사가 패함에 고니시는 오늘이나 내일 사이에 평양을 떠나서 의주를 무찌른다고 호언하며 조선 조정에 글을 보내 이르기를 양의 떼가 한 마리의 범을 공격함이라고 겁을 주었다.”

“네, 고니시는 상인출신이어서 머리가 좀 돌아가는 자인지라 조선 조정을 겁을 주기고 하고 화친을 맺자는 전략을 세우는 자였습니다. 평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중간의 각 읍의 백성들은 모두 피난 할 짐을 싸놓고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고 적병이 밀려올 것을 무서워하고 있을 때 명나라에서 조선의 수군이 일본 수군을 연이어 대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절강사람 심유경(沈惟敬)이란 자를 조선에 보내 조선과 일본의 화친을 도모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음! 옛날이나 현재, 미래에도 국가와 국가 간에 외교전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유경이란 자는 일본을 다녀온 일이 있어 일본의 사정을 잘 아노라고 자칭하고 병부상서 석성에게 자원하여 세치 혀로서 일본군을 물리칠 것을 장담하니, 석성의 마음과 명나라 조정의 뜻이 일치하여 될 수 있으면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평화적 외교수단으로 일본군을 조선에서 퇴병시켜 후환을 덜어내려는 정책을 펴려고 하던 때였다. 당시에 명나라는 재정이 부족하고 내란이 평정되지 아니하여 만 리나 떨어진 조선에 많은 병사를 보내기 곤란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개 부랑자인 심유경이 유격장군이란 벼슬을 받아 얼마간의 호위병을 데리고 9월경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