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동주의 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필요가 없다. 시를 읽는 순간 언어의 감미로운 아름다움이 그대로 묻어 나오면서 던져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눈에 보이는 영상으로 확실하게 살아 움직인다. 그의 시를 평한다거나 쓰인 배경 등을 이야기 하는 것은 오히려 사족일 뿐이다. 시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시인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시인의 시와 함께 그분의 숭고한 뜻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서시(序詩)’ 전문”

시인은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민족의 자아 성찰에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일제에 의해 병탄된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들을 반성하고, 그 반성에서 얻은 것을 지식으로 보완하여, 조국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본 것이리라. 그래서 시인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서시를 읊으면서도, ‘가을로 가득 찬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을 보며 ‘별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어머니’를 부르면서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아슬히 먼” 가을 하늘의 별 보다는 다가올 봄을 더 기다렸다. 가을 하늘의 “별 헤는 밤”을 보내며 조국광복을 염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국 광복은 앉아서 기다린다고 될 일이 아니기에 시인은 일본 유학을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상태로는 일본 유학을 할 수 없는 시대상황에 직면한 시인의 가족들은 고민 끝에 히라누마로 창씨개명 한다. 창씨개명을 한 것이 일본에 유학하여 앞선 지식을 배움으로써 조국 독립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지만, 시인은 그 고통과 참담한 심정을 담아 참회록을 쏟아 낸다.

“파아란 녹이 낀 구리거울속에서/ 내 얼골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줄에 주리자-만24년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어 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참회록’ 중에서”

24살 젊은 나이에 왕조의 부끄러움을 씻기 위해서 거울을 닦으려고 창씨개명하고 유학했다지만, 창씨개명 그 자체가 부끄러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시인의 비애였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고백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즐거운 날이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인은 그렇게도 원하던 조국 광복을 6개월 남겨 놓은 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운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다.=십자가 중에서”던 자신의 뜻에 따라, 일제에 의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옥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시인의 죽음은 허락된 십자가가 아니라 일제의 생체실험 도구가 되어 처참하게 희생된 학살이었다.

우리는 조국 광복을 염원하던 시인의 뜻과 죽음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시인이 생체실험을 당하다가 옥사했다는 것을 밝힐 의무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고 시급한 문제가 우리 앞에 직면해 있다. 대한민국의 언어로 말하고 한글로 시를 짓던 시인은 분명한 대한민국의 아들임을 자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인의 용정 생가에는 ‘중국조선족 애국시인’이라는 팻말과 함께 시인의 시가 한문으로 번역된 시비(詩碑)가 서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항의 한마디 못하고 있다. 중국에게 얼마나 더 당해야 정신을 차릴 것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나를 비롯한 이 시대의 그 누구라도, 어쩔 수 없는 환경에 부딪혀 나라와 민족 앞에서 잘못을 범했을 때 시인처럼 참회록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시대의 그 누구라도 내 잘못을 남들이 알게 되면 변명을 먼저 하는 것이 상식처럼 통하는 세상이 되어버린지 오래 되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숭고한 시인의 정신을 높이 사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중국에게 제대로 항의조차 하지 못한 채 시인을 중국조선족으로 굳혀가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 시인을 다시 만나고 싶은 까닭은, 시인이 읊었던 참회록을 들으면서, 그렇게 행동하는 지금의 우리를 반성하고 싶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