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곡리에서, 53×45㎝ with a pen, use the acrylic ink on paper, 2014

 

매서운 바람을 가르고 들어선 보안여관 가득 '따뜻한 밥상'이 차려져 있습니다. 얼핏 그 밥상은 차갑게 식고 굳은 듯 보입니다. 차분히 숨을 고른 후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가 귀 기울이면 전시장 마디마디 차려진 소박하고 따스한 밥상이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먼 길을 돌아 찾아간 고향, 저를 반겨주는 것은 늘 따뜻한 밥상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갓 지은 밥을 고봉으로 한가득 퍼 담고, 아껴두었던 고등어를 꺼내 화롯불에 노릇노릇 굽고, 김치 쫑쫑 썰어 심심하게 짠지국을 끓여 내고, 텃밭에서 딴 노각과 가지와 고춧잎을 조물조물 나물 반찬을 무쳐 한 상에 소담하게 담아 오랜만에 마주한 손녀 앞에 쓱 밀어주었습니다.

한술 뜨면 그게 꿀맛이었습니다. 화려할 것 없는 그 소박한 음식이 지금까지 제 인생에 가장 맛있고 그리운 한 끼로 자리하고 있는 건 모든 것을 보듬고 토닥여 주는 사랑과 정성의 밥상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따뜻한 밥상으로 마음의 허기를 채우고 덧난 상처에 새살이 돋았으면 합니다. 그동안 누군가의 수고로움과 희생으로 차려진 따스함을 누려왔음을 고백합니다.

 

▲ 12월 대곡리가게, 25×25㎝, 2014

 

◇욕심 덜어내는 마음 배웁니다

이제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정성껏 밥상(작은 실천)을 차려야 할 때임을 깨닫습니다. 따뜻한 밥상에 여럿이 둘러앉아 무언가를 나눌 때, 내 그릇은 소박해져도 마음은 더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시린 겨울밤에 떠올립니다. 함께여서 고맙습니다. 스무 해 넘게 오래된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며 그 가게를 그림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 구멍가게들은 하나, 둘 문을 닫고 거리마다 편의점과 대형마트가 들어섰습니다. 머지않아 유년의 보물창고였던 구멍가게는 우리 곁에서 사라질 것 같습니다. 올 가을 여행길에 찾았던 충북 괴산군 감물면의 구멍가게는 한자리에서 80년을 있었습니다. 세월 따라 초가지붕이 슬레이트지붕, 함석지붕으로 바뀌었고 스물셋 수줍던 새색시는 어느덧 백발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학교가 문을 열었다가 점차 학생이 줄어들자 폐교가 되었고, 그 자리에는 면사무소가 들어서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해 전 근방에 대형마트가 생겼습니다. 구멍가게는 이를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지금도 쓰고 계신 오래된 나무 돈통이 하루 벌이만으로도 묵직해지던 시절을 주인할머니는 어제 일처럼 기억하십니다.

그동안 뵈었던 구멍가게 어르신들의 삶 속에서 욕심을 덜어내는 마음을 배웁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 어느덧 저 또한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나잇값을 하며 살아왔는지 되돌아봅니다.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어려움에 때론 절망하기도 하지만,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 않고 주어진 일에 정성을 다하는 99%의 사람들이 무시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나의 갈 길이라고 김근태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바람대로 일상의 민주주의를 더 이상 외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면, 오래된 가게가 더 이상 문을 닫지 않고 대를 이어갈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어 봅니다. 오래전 김근태 선생님의 얼굴을 뉴스에서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전시 의뢰를 받은 후 ‘김근태 알아가기’를 시작했습니다. 흐릿했던 기억 속 얼굴이, 눈빛이 또렷하게 다가올 즈음, 가장 귀한 밥상을 누가 차린 줄도 모른 채 지금까지 받아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흥인수퍼, 91×72㎝, 2015

 

◇온기 다시 꺼내어 따뜻한 밥상에 올려놓습니다

김근태 추모 전시는 ‘근태생각’의 뿌리가 어디에 있고 남아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제시해준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추모전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자 고 김근태 선생 6주기 추모전-따뜻한 밥상’전(展)이 일상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지표가 될 수 있게 더 많은 사람들 속에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함께 살만한 세상이 되는 그날까지 변화를 도모하고 실천하는 전시를 계속 이어나갔으면 합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알게 된 걸 미처 알지 못했다면 지금의 마음을 깨닫고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기에, 함께한 이번 전시는 저에게도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끝으로 일상의 민주주의를 위해 애쓰셨던 모든 등대지기분 들께 마음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어릴 적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먼 길 다녀오는 이를 위해 밥을 지어 이불 속에 묻어둔 밥공기의 온기를 기억합니다. 그 온기를 다시금 꺼내어 따뜻한 밥상에 올려놓습니다.

△글=이미경 작가(ARTIST LEE ME KYEOUNG, 李美京)

 

▲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미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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