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짓 파이 위원장이 이끄는 미국 FCC(연방통신위원회)가 14일(현지시간) 망 중립성 원칙을 전격 폐지했다. FCC 회의 결과 3대2로 망 중립성을 폐지했다는 설명이다. 오바마 행정부 당시 톰 휠러 위원장이 정립한 망 중립성 강화 원칙이 트럼프 행정부의 아짓 파이 위원장 체제의 FCC에서 180도 달라진 셈이다. 인터넷은 공공의 서비스라는 원칙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글로벌 인터넷 사업의 지각변동이 예상된다.

▲ 아짓 파이 FCC 위원장. 출처=갈무리

우여곡절 끝 도출된 망 중립성 폐지
올해 초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은 제로레이팅(Zero Rating) 정책을 강하게 추진하며 망 중립성 폐지에도 시동을 걸었다.

지난해 FCC 주도로 진행되던 제로레이팅 전수조사를 중단시킨 시점에서 예견되었던 일이다. 망 중립성은 인터넷 망을 사용하는 사업자는 어떠한 견제도 없이 동일하게 망을 활용할 수 있다는 원칙이며, 제로레이팅은 통신 사업자가 특정 서비스에 이용되는 서비스에 데이터 요금을 부과하지 않는 방식이다.

망 중립성은 ICT 인터넷 업계의 매우 뜨거운 화두다. 모든 사업자가 망을 동일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구글과 넷플릭스, 페이스북과 같은 플랫폼 사업자들이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망 사용에 있어 트래픽에 따라 통신사가 제어권을 가졌다면 실리콘밸리의 혁신은 불가능했다는 점에 이견이 없다.

망 중립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통신사와 플랫폼 사업자의 관계부터 따져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망, 즉 네트워크는 고속도로에 비유된다. 통신사들은 고속도로를 운영하는 회사, 플랫폼 회사들은 휴게소로 정의할 수 있다.

지금까지 통신사들은 망, 즉 고속도로를 개설하거나 확장하면서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고객)로부터 돈을 받았다. 더욱 빠르게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도록 4차선, 8차선 고속도로를 구축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다는 뜻이다. 4G 시대 LTE의 다양한 버전은 모두 고속도로의 속도, 즉 데이터 이동 속도를 키우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 자료사진 고속도로. 출처=픽사베이

문제는 플랫폼 사업자들의 등장이다. 구글과 페이스북 등 플랫폼 사업자들은 통신사들이 관리하는 고속도로에 휴게소를 설립해 고객들의 사용자 경험을 증진시켰다. 고객들은 단순히 고속도로를 운행하며 이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을 하는 도중 휴게소에 들어와 핫바도 사먹고 화장실도 가게됐다.

이렇게 되자 실제 돈을 버는 곳은 고속도로를 운용하는 통신사가 아닌 휴게소 영업을 하는 구글과 페이스북이 된다. 통신사들은 자신들이 자금을 집행해 만든 고속도로를 운영하는 것에만 머물고, 실익은 구글과 페이스북이 가져가는 구조에 불만을 가지게 됐다.

여기서 망 중립성이 화두로 부상한다. 통신사들은 고속도로를 이용하며 휴게소에 들르는 고객들이 많아지자 휴게소도 고속도로 운영의 부담을 일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 연장선에서 고객의 집중도를 제어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한다. 망 중립성 폐지, 즉 고속도로를 통해 사업을 하는 휴게소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사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리콘밸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탄생한 오바마 행정부는 고속도로를 통해 사업을 하는 휴게소의 권익을 충분히 보장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통신사 출신인 아짓 파이 위원장을 내세워 통신사의 권익을 주장하고 나섰다. 표면적으로는 망 중립성이 통신사의 추가 투자를 막아 일자리 창출에 악영향을 준다는 논리지만, 내밀하게 들어가면 실리콘밸리와 각을 세우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의 노림수도 있다는 평가다.

실리콘밸리 기업은 발칵 뒤집혔다. 망 중립성 폐지에 앞서 공개 서한을 보내 망 중립성 강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제시하는 한편, 하드웨어 사용자 경험에 치중한 애플까지 망 중립성 폐지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FCC의 망 중립성 폐지 회의가 있기 전 일반인을 대상으로 치뤄진 설문조사에 '기계 봇'이 자동으로 '폐지 반대'에 다수 표를 던졌다는 점까지 알려지며 논란은 증폭됐다. 그러나 FCC는 망 중립성 폐지를 선언하며 일각에서 제기되던 '신중론'을 꺾었다.

▲ 출처=픽사베이

ICT 플랫폼 기업 악재...우리는?
망 중립성이 폐기되면 통신사는 이득이고 ICT 플랫폼 기업은 악재다.

통신사는 단순히 망을 제공하는 비즈니스 사업으로도 한동안 안정적인 사업을 영위할 수 있게 됐다.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뜻이다. 당장 플랫폼 사업자를 견제할 수 있는 다양한 카드를 가질 수 있게 됐다. 공격과 방어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공격으로는 초연결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방법이다. 망 중립성 폐지가 선언되면 플랫폼 사업자들의 입지는 좁아질 수 밖에 없으며, 그 틈을 노려 통신사들은 자신들이 초연결 시대의 핵심 플레이어로 부상할 수 있게 된다. 플랫폼 사업자들의 전유물이던 미디어 콘텐츠 사업은 물론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ICT 전반의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신들이 고속도로는 물론 휴게소까지 만들겠다는 뜻이다. 이미 많은 통신사들은 탈 통신을 선언하고 있으며, 국내 통신사들도 경쟁적으로 인공지능 스피커를 출시해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방어로는 제로레이팅이 꼽힌다. 망 중립성이 폐지되면 통신사가 트래픽을 운용할 수 있는 권한이 강해진다. 사실 제로레이팅과 망 중립성은 뚜렷한 교집합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망 중립성은 제로레이팅과 사안이 약간 다르다. 망 중립성은 통신사가 주로 ICT 기업 서비스에 대해 차별적 대응을 하지 못하는 개념이지만 제로레이팅은 서비스 품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소비자의 혜택에 집중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로레이팅이 망 중립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은 성립된다. 쉽게 말하자면 통신 서비스의 조절이라는 원론적인 방식인 제로레이팅을 통신사가 허용하는 개념 자체가 망 중립성에 위배된다는 뜻이다. 통신사들은 망 중립성 폐지를 이용해 계열사에 트래픽을 활용한 '경쟁력'을 실어줄 수 있으며, 이는 다른 플랫폼 기업들에게 분명한 악재다.

ICT 플랫폼 사업자들은 100% 악재 그 자체다. 국내에서 벌어졌던 통신사와 카카오, 통신사와 삼성전자 스마트TV 분쟁을 예로 들어 보자. 만약 망 중립성 폐지가 원칙이 된다면 최종승자는 모두 통신사가 된다. 특히 넷플릭스 등이 있는 OTT 시장의 경우 '제로레이팅-망 중립성' 연결고리의 직격탄을 맞을 전망이다. 이미 유료시장의 패권이 IPTV로 넘어간 상태에서 제로레이팅과 망 중립성 콜라보가 OTT 시장을 빠르게 장악할 경우, 통신사 외 사업자의 경쟁력은 크게 축소된다. AT&T가 디렉TV나우에 제로레이팅을 적용한 것이 넷플릭스를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망을 가진 통신사는 제로레이팅이라는 이슈를 통해 망 중립성을 파괴할 수 있는 '권능'을 보장받으며, 이를 바탕으로 OTT 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시야를 더 확장하면 모바일 미디어 사업 전반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칠 소지도 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비롯해 다수의 ICT 사업자들이 스트리밍 라이브 서비스를 통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통신사의 망 중립성 카드는 다양한 측면에서 '제어의 손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국내 사정에 이목이 집중된다. 국내의 방송통신위원회가 미국 FCC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을 정도로 국내 ICT 통신 환경은 미국을 지향한다.

국내 사정은 어떨까? 현재 국내 망 중립성 정책은 미국 오바마 행정부 당시와 동일한 강화 기조다. 최근 토론회에서 김종영 방통위 과장은 “고시를 통해 망 중립성과 플랫폼 중립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면서 “이용자 편익을 저해하는 행위를 맞는 개념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망 중립성 가이드라인을 운영하고 있는 송재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장은 “제로레이팅에 대한 많은 찬반논쟁이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정부는 제로레이팅을 일단 허용하고, 추후 모니터링을 통해 사후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일말의 여지를 남겼다.

망 중립성 강화 원칙을 예정대로 끌고가지만, 미국과 글로벌 시장의 변화에 따라 망 중립성 정책에 변화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변수는 통신사들의 지위다. 미국 통신사는 인터넷서비스제공업체(ISP)로 분류되어 있지만 국내 통신사들은 모두 기간 인프라 사업자로 되어 있어 정부의 강력한 규제를 받는다. 미국의 상황에 따라 국내 정책이 변하기는 하겠지만, 당분간 기간 인프라 사업자에 대한 전격적인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중론이다. 국내 망 중립성 강화 기조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갑론을박은 피할 수 없다. 망 중립성 강화와 제로레이팅이 연결되며 플랫폼 사업자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당분간 국내 망 중립성 강화는 계속될 것"이라면서도 "이해 당사자들이 시장의 판을 바꾸기 위해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