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스트 오블리주> 애덤 파이빌드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펴냄

이 책의 주인공은 구글 검색에도 안 나온다. ‘짐 그랜트’가 아닌 본명 ‘제임스 그랜트’를 입력해도 1967년 6월 13일자 <매일경제> 기사 1건이 고작이다. “존슨 미대통령이 제임스. P. 그랜트 씨를 국제개발처(AID) 월남계획담당 차장보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는 워싱턴발 1단짜리 기사다.

짐 그랜트는 1980년 유니세프 3대 총재로 취임한 국제원조 전문가다. 그는 취임 첫 공식성명에서 해마다 1400만명의 아이들이 죽는다며 아동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유니세프의 활동 속도를 더 높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고는 그 목표를 향해 지지자들과 재원을 모으고 ‘악마’와도 협상하며 세계를 누볐다. ‘아동 생존 혁명’의 시작이었다.

개도국 어린이 죽음은 대부분 설사, 영양실조, 폐렴, 홍역 등이 원인으로 기본적 처치만으로 예방 가능한 것이었다. 그랜트는 특히 설사병에 주목했다. 해법은 소금과 설탕을 일정 비율로 섞은 1봉지 10센트짜리 ‘경구 재수화염(經口再水化鹽)’이었다. 이것을 물에 타서 먹이면 탈수증상을 막아 설사병을 잡을 수 있었다. 그는 경구 재수화염 봉지를 셔츠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넣고 다니며 사업을 홍보할 만한 대상을 만나면 뜯어서 시연했다.

그랜트는 예방 접종에도 매달렸다. 기성세력들은 왜 아동 사망 같은 ‘증상’에만 몰두하느냐, 근본적으로 빈곤을 해결할 장기적인 대책부터 추진해야 하지 않느냐고 비난했다. 이런 비판에 대해 그랜트는 “바로 이 ‘증상’이 가난한 사람의 잠재력을 파괴한다”고 반박했다. 의료계의 우려와 비판도 쏟아졌다. 실제로 개도국들은 백신을 신속하게 옮길 수 있는 도로 사정이 열악하고, 저온유통체계도 없었으며, 백신을 적정온도에서 보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전기 공급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랜트는 저항의 벽을 뚫었다. <세계아동백서 1982~1983>를 발간해 예방 가능한 어린이 사망자가 매일 2만명에 달한다고 알려 세계의 관심을 모은 뒤 콜롬비아에서 성공사례를 만들었다. 그는 지역 사회와 협력하고 기반 시설을 활용했다. 콜롬비아 민간 항공 순찰대는 저온 유통 체계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들은 보유한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안데스 산맥 지역까지 약을 안전하게 배송했다. 활주로에 착륙하면 약이 든 아이스박스를 노새의 등에 실어 산속으로 향했다. 야간 배송 시 착륙 유도등이 없는 소규모 공항 활주로에는 마을 자동차와 트럭들이 줄지어 서서 전조등을 켰다.

엘살바도르에서는 예방 접종을 위해 내전을 멈추게 했다. 그의 중재로 엘살바도르 정부군과 반군은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단하는 ‘고요한 평화의 날’을 만들었다. ‘고요한 평화의 날’에는 매번 수십만명의 어린이들이 예방주사를 맞았다. 수단,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유고슬라비아 등에서도 예방접종을 위한 ‘일시 휴전’이 이뤄졌다.

그는 독재자들과의 협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1984년, 에티오피아 멩기스투 독재정권을 공개 비판하다 추방당한 ‘국경 없는 의사회’는 “멩기스투와 손잡고 일하는 것은 에티오피아 국민을 탄압하고 대량 학살을 일삼은 독재자의 정책을 합법화하는 것”이라며 유니세프를 맹렬히 비난했다. 이에 그랜트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니세프는 국제 앰네스티가 아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은 (정치-윤리적)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다. 주어진 정부와 일해야만 한다. 거기서 최선의 결과를 끌어내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유니세프는 ‘본분’에 집중했다. 그 결과 멩기스투의 도움으로 반군이 득세한 지역에까지 구호물자를 전달할 수 있었다.

그랜트는 유니세프 재임 기간 수화물 없이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호텔 세면대에서 구김 가지 않는 양복을 직접 빨아 입었다. 만성 허리통으로 비행기 복도에 누워서 가기도 했다. 그러던 1995년 1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총재로 재임한 15년간 총 2500만명의 어린이가 생명을 건졌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소홀히 취급됐다. <뉴욕타임스>도 짐 그랜트의 부고를 눈에 안 띄는 지면의 한 구석에 배치했다. 며칠 뒤 한 극작가의 부음을 1면에 대대적으로 싣고 사설까지 낸 것과 대비됐다. 당시 유엔에 주어진 노벨 평화상도 유엔 사무총장에게 돌아갔다.

사후 외부 전문가들이 만든 예방접종 사업 평가서는 “대중과 정치권의 관심을 모으고 놀랄 만한 숫자의 아이들을 질병과 죽음에서 구했지만, 지나치게 단기목표에 집중해 장기적 지속성을 해쳤다.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고 그랜트의 업적을 폄하했다. 짐 그랜트와 그의 위대한 업적은 이렇게 점차 역사 속으로 묻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