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미국과는 다른 형태의 은행 중심 대형화와 겸업화를 도입하고 있다. 이를 가리켜 ‘유니버셜뱅킹’이라고도 한다. 이는 은행이 보험·증권·카드 등 금융지주사가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는 법인의 업무를 유럽의 은행은 한꺼번에 다 한다는 의미다. 이런 경영의 묘를 살려 독일의 도이치뱅크는 총 자산규모로 한때 세계 제1의 은행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다만 우리와 눈에 띄게 다른 점은 CEO 선임 시 투자자나 심지어 노동조합의 의견까지 반영한 민주적 절차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경영 투명성을 위해 노사 관계자를 이사회에 두는 등 세부적인 규제 방안도 도입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에는 전통적인 유럽 금융 강호인 잉글랜드뱅크(영란은행 혹은 영국은행)와 HSBC가 있다. 독일에는 유니버설 뱅크라고 불리는 도이치뱅크, 그리고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의 왕실과 거래하는 로열 뱅크인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이 있다.

영국은 1960년대 후반부터 유로 달러가 시티오브런던(이하 시티, 잉글랜드뱅크를 포함해 각종 금융회사가 빼곡히 들어선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금융센터)에 집중되면서 이를 활용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먼저 금융자유화를 개시한 나라다.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은 1971년에 가맹은행의 금리 카르텔을 해체하고 1979년에는 외환관리를 철폐했다.

영국은 1986년에 금융 빅뱅, 즉 금융지주회사제도를 채택하면서 경쟁촉진적 정책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빅뱅은 경쟁에 의한 국내 시장 효율화,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시티와 영국 금융기관의 국제경쟁력 강화에 있었다.

지주사 형태로 전환된 이후 영국은행은 겸업화와 대형화가 추진됐다. 영국계 글로벌 투자은행을 만들기 위한 복합금융그룹 합병운동이 진행됐다. 또 전문적 분업체제도 급속히 붕괴하면서 겸업화가 진전됐다. 이후 영국 대형 은행들은 1990년대에 여러 인수 합병을 거친 뒤 짧은 시간에 바클레이스와 HSBC 등의 빅 5체제로 재편됐다.

CEO 선임, 투자자·노조 등 동의 있어야

주요 5개 은행의 규모가 확대되고 막강한 힘을 얻자, 은행의 회장과 사장(CEO) 선임 절차 개선도 요구됐다. 이에 HSBC는 회장과 사장 선임과정에서 주요 주주인 기관투자가들에게 선임과정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다. 또 외부로부터 자문을 받고, 감독당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절차를 도입했다. 기관투자가와 협의하고 사전에 감독당국과의 적합성 검사를 거치는 것은 HSBC의 경우만이 아니라 영국 금융기관들의 주요 임원 선임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관행이다.

독일의 은행들은 전통적인 상업업무 외에도 본사에서 투자은행 업무를 수행해왔다. 은행이 산업에 직접 개입하는 형태의 겸업은행의 모습을 띠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는 상업은행 업무보다 투자은행 업무의 비중이 눈에 띄게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대형은행의 수익 원천으로서 상업은행 업무나 대출 업무의 중요성은 낮아지고 대신 투자은행 업무의 중요성이 강조됐다.

독일을 대표하는 도이치뱅크도 1990년대 중반 들어서 투자은행 업무를 크게 강화했다. 도이치뱅크는 유럽을 중심으로 가계금융 및 기업금융을 종합적으로 취급하다가 국제금융시장에서 투자은행업무와 자산관리업무의 경쟁력을 보완하기 위해 ‘뱅커스 트러스트’를 인수하며 몸집을 키웠다.

도이치뱅크도 규모가 커지면서 이사회 제도에 변화를 주었다. 경영 투명성을 위해서다. 2009년 도입된 독일의 기업지배구조 규칙은 CEO가 이사회 의장직으로 이동하는 데는 2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규칙은 전 CEO가 이사회 의장으로 바로 이동해 CEO의 경영권에 개입하거나 통제할 우려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다만 주주총회에서 25% 이상의 지지를 얻는 경우 예외적으로 CEO가 바로 이사회 의장직으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외에 유럽에는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의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처럼 금산분리 없이 비금융자회사와 금융자회사를 모두 거느리는 지주회사 체제도 있다. 발렌베리 가문은 금융을 비롯해 건설, 항공, 가전, 통신 등 다양한 산업에 투자하고 있다. 이들은 150년 이상의 시간 동안 5대에 걸쳐 경영 세습을 했다. 이 가문이 운영하는 기업은 스웨덴 주식시장의 시가총액 40%에 이르고 국내총생산(GDP) 30%에 육박하는 규모를 자랑한다.

이들 그룹에는 특별한 원칙이 있는데 반드시 노동조합 대표를 이사회에 중용하는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경영투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순이익 상당수는 가문 재단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경영 세습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후계자 요건이 까다롭다. 후계자는 혼자 힘으로 명문대를 졸업해야 하고, 해군사관학교를 나와야 한다. 또 부모의 도움 없이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에 진출해서 실무 경험과 금융 흐름을 익혀야 한다. 후계자 평가는 10년 이상 걸리며, 견제와 균형을 위해 2명을 뽑는다.

이경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부위원장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은행은 법 제도적 규정 여부와 관계없이 지주회사 차원의 대화 채널을 구성하고 있다”면서 “이를 통해 그룹 경영에 관한 노사 간 이해와 협력의 폭을 넓히고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