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피폐하고 절박한 백성들이 삶에 의욕이 없을 때 한산도와 금산싸움의 영향을 받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것은 이순신장군의 용기와 지략이 패전한 조선 백성에게 새로운 힘을 준 것이었다.”

“네, 맞습니다. 의병 뿐 아니라 관리 중에서도 새로운 용기를 얻어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 김제 군수 정담해와 해남 현감 변응정 같은 분들입니다.”

“음! 좋은 일이다. 적군이 이순신장군에게 패해 도저히 바다를 통해 전라도에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으나 일본군들이 조선을 다스리고 경영함에 있어서 전라도를 원하는 바가 컸다. 왜냐하면 전라도는 조선의 곡창일 뿐 아니라 다른 물산이 풍부하여 수많은 군사를 주둔하는데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네, 그리고 조선 7도를 손에 넣고도 이순신장군 한사람 때문에 전라도에 발을 못 붙이는 것이 일본 놈들의 위신에 관계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맞는 말이다. 가장 무섭고 가장 미운 장군의 활동을 지원하는 후방기지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전라도를 손에 넣는 것은 일본 놈들의 절대적으로 원하였다.”

“네, 그래서 일본군은 한산도에서 패전한 이래로 육로라도 전라도를 손에 넣으려고 전략을 변경하여 서울로부터 내려오는 적병들이 말할 때 전라도는 반드시 경략이라고 하였습니다.”

“음! 적군은 한양 이북으로 갔던 군사들을 불러들여 전라도 공략에 전력을 다하려고 했다. 1592년 8월 6일, 음력칠월 그믐께의 丁巳일쯤, 적군은 경상우도 초계로부터 안의와 전라도 장수를 지나 전주를 치려고 하였다.”

“네, 김제 군수 정담해와 해남 현감 변응정은 감사 이광에게 사세가 위급할 것을 말하였으나 용인에서 패전한 쓴 경험이 있어 겁을 집어먹고 전주성을 지킨다는 핑계로 출전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정담해와 변응정은 분개하여 자기 수하의 병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적을 막기 좋은 길목으로 웅치를 선택한 후 목책을 만들어 산길을 끊어 적군을 막기로 하였습니다.”

“음! 적군의 수만 군사가 웅치로 몰려들어오는 것을 정담해와 변응정은 용감하게 선두에서 군사를 지휘하여 아침부터 석양까지 싸웠다. 적군은 아군보다 수십 갑절이 되는 군사가 있었으나 아군이 높은 곳에 목책을 세우고 싸우기 때문에 아군이 죽는 수보다 적군이 죽어나가는 수가 몇 갑절이나 되었다.”

“네, 전투는 지리적 조건이 매우 중요한데 신립장군의 충주전투는 엉망이 되었으나 웅치전투는 종일 싸움에 아군도 거의 전사하여 200명가량 남았을 때 적군이 뒤로 물러가는 듯하더니 밤에 세 길로 나눠 몰려 올라와서 담해 군수의 진을 완전히 포위하고 항복하라고 외쳤으나 담해 군수는 단연코 항복을 거부하고 칼을 들고 싸움터에 맨 먼저 뛰어 들어 싸우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담해 군수가 전사함에 따라 응정 현감이 대신 나서서 남은 군사를 호령하며 싸웠으나 그 역시 철환에 맞아 전사하고 군사들도 담해 군수와 응정 현감의 충의에 감격하여 한명도 남김없이 전사하여 웅치의 전투장은 시체가 길을 막아 사람이 통행할 수 없었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적군의 장수가 군사를 시켜 아군 장졸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 여럿을 만들고 그 위에 목패를 깎아

‘조선국의 충성스러운 마음과 의로운 용기를 가진 장수를 조문하노라!’

라고 써서 세웠다. 적군의 장수가 아군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보면 예의를 아는 장수다.”

“네, 그 이튿날 적군은 전주성 밖에 다다르니, 전주의 관리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려 하였으나 감사 이광은 선화당(宣化堂=조선시대에 각 도의 관찰사사 집무하던 正堂)에 있어 나서지를 못하는 때에 전 홍문전적 이정란이 문관복을 입고 성내에 들어가 달아나려는 관리와 백성들을 불러 놓고

‘우리가 죽을지언정 전주성을 적군에게 내주지 못하리라!’ 하고 외쳤습니다.”

“음! 백발이 성성한 이 전적의 정성스러운 뜻은 전주 관민의 마음을 감동케 하여 죽기로 싸워 전주성을 지켜내기로 맹세하였다. 적군도 웅치에서 많은 군사들이 죽어 의기가 꺾인데다가 전라도 사람이 다른 도 사람들과 달리 대단히 용감한 것을 두려워하여 전주성을 버리고 물러가 다른 도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