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득공은 <발해고>를 남김으로써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는 대진국 발해가 생활터전으로 삼았던 만주까지 라는 것을 기록으로 남긴 분이다. 그러나 유득공의 이와 같은 위대한 업적은 정조대왕의 개혁적인 정치가 없었다면 세상에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가장 큰 패악이라면 양반과 상민이라는 계급과 일부다처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시대에는 지구상의 대부분 나라가 신분사회로 나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계급사회는 어느 정도 인정을 한다고 치더라도 일부다체제의 희생물인 서자(庶子)에 대한 차별에서 오는 인적자원의 손실은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소였다. 자신의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서자라는 이유로 자식 취급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철저한 제약을 받았다. 당시 서자들에 대한 차별은 조선의 통일 법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잘 나타나있다. 양민의 신분으로 첩이된 사람의 자식은 그나마 관직에 들 수 있었다. 그러나 종이나 기생 등 양민이 아닌 자가 첩이되어 난 자식은 벼슬에 들 수 없었다.

정조대왕은 할아버지 영조가 탕평책이라는 기치아래 계파정치를 배제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싶었지만, 결국 서인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던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왕이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계파를 없애고 실질적으로 능력이 있는 인물들을 중용하고 싶었던 왕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시도를 한 것이 바로 규장각의 검서관들을 학문이 뛰어난 서얼들로 채용한 것이다. 초대 검서관에 임명된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서이수 네 사람 모두가 서얼이었지만 누구보다도 뛰어난 학문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시는 백탑파의 구성원들로 조선을 잠에서 깨울 수도 있었던 실학파의 실질적인 인물들이기도 했다.

유득공은 규장각 검서관으로 일을 한 덕분에 일반 사람들은 접하기 힘든 많은 문헌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그것이 결국 그에게는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게 되었다. 그는 신라중심의 역사관을 벗어나서 ‘통일신라’가 아니라 신라와 발해가 병존하던 ‘남북국시대’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인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로 고구려의 후예이며 당연히 조선의 역사이고 발해의 영토인 만주는 조선에 귀속되었어야 한다고 했다. 조선의 국력이 약한 것이 바로 만주라는 발해영토를 조선에 귀속하지 못한 것에 그 근본원인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발해고> 서문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고려가 고구려의 후손임을 자부하며 신라와 발해를 통합하였으니 발해와 신라의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발해사를 쓰지 않아 신라의 땅은 소유하였지만 발해의 땅은 소유하지 못한 것은 한탄할 일이다. 고려가 발해사를 썼었더라면 발해의 땅이 고구려 땅이라는 점을 강조해서 여진과 거란으로부터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땅을 거두어 올 수 있게 하였다면 압록강 서쪽의 땅과 토문강 북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도 발해사를 남기지 않아 발해의 땅을 얻지 못한 까닭이다.’

청나라 섭정관이 들어와 있던 그 시대에 발해고를 저술해서 대진국 발해의 영토였던 만주가 청나라의 영토가 아니라 조선의 영토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그 기백이 부럽다. 물론 그 시대에는 청나라의 여진족이 우리와 같은 뿌리라는 것 보다는 적으로 간주한 견해로 당시 청나라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지만, 발해이후로는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의 청나라가 만주를 지배했었을 뿐 한족의 중국은 한 번도 만주를 지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천명하여, 지금 한족 중심의 중국이 만주를 지배하는 것 자체가 불법임을 밝혀주는 사료이기도 하다.

만주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나라 영토라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지금의 우리와 비교를 해 보면 유득공의 붓에서 흐르던 나라사랑에 대한 기개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그러한 인재가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정조대왕의 개혁적인 인재등용이 그리워지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