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가 성군이 될 자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용골대와 다이곤은 소현세자를 극진히 예우한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소현세자를 졸지에 독살당하는 상황으로 몰아넣게 된다.

청나라에서 행하는 소현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보내진, 김자점의 끄나풀 신득연을 통해서 조선으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전달된 소식은 인조에게 보고되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왜곡되어 전달되고 있었다. 세자가 명나라와의 전쟁에 참여하여 용감히 싸운 것은 인조 자신에게 삼배구고두례의 치욕을 안긴 청나라에게 잘 보임으로써 세자의 왕좌를 굳건히 하기 위한 술책으로 보고되었고, 그것은 오랑캐인 청나라 황제로부터 조선 국왕으로 인준 받기 위한 행위라고 전달된 것이다.

인조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은 명나라의 인준에 의해서 왕좌에 앉은 사람이다. 그런데 명나라는 망하고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은 왕으로서 인준을 받지 못한 신세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충성함으로써 자신의 왕좌에 도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인조 자신이 반정에 의해 왕좌에 오른 사람이다 보니 세력을 잃으면 왕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터라 그런 의심은 더 커져만 갔다. 게다가 소현세자가 청 태조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이자 당시 중국대륙의 실질적인 세력가로 청 세조를 섭정하던 다이곤과 군부 최고 권력자인 용골대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는 사실까지 전해 졌으니 인조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청나라가 언제 자신을 폐위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앉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소현세자가 아들로 보인 것이 아니라 권력의 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결국 소현세자는 인조의 눈 밖에 남으로써 1637년 볼모로 청나라에 갔다가 1645년 2월 18일에 귀국하여, 귀국한지 2개월여 만인 4월 26일에 독살되고 만다.

소현세자가 인조의 묵인 하에 독살되었다는 것은 왕조실록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인조 23년 4월 27일(기묘) 다섯 번째 기사에 보면 학질에 걸린 세자에게 침을 놓아 죽게 한 이형익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인조가 국문할 것 없다고 거절하는 것을 보면 충분히 의심이 가고도 남는 일이며, 그 의문을 뒷받침하는 기록으로는 인조 23년 6월 27일(무인) 첫번째 기사에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고 한 것이다.

 

소현세자는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며, 우리가 만주라는 영토를 잃어버렸기에 약소국으로 살 수 밖에 없음을 알고 그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서 고민하던 분이셨다. 그분은 왕좌에 오르지 못해서 그 꿈을 펴지는 못했지만, 함께 청나라 볼모로 갔던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그분의 꿈을 이어받아 펼치기 위해서 북벌을 감행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다. 북벌을 감행하기 위해서 군사력이 강화되면 왕권이 강화되고 그렇게 되면 양반․사대부들이 상대적으로 힘을 잃는 다는 것을 아는 송시열 등에 의해서 북벌의 꿈이 좌절되기는 했지만, 시도를 했었다는 그 자체도 소현세자의 꿈이었던 것이다. 만일 그분이 왕위에 오르셨다면 조선은 적어도 200년은 앞서갔을 것이고 일제에 의한 강점기도 없었을 것이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소현세자처럼 겉보기에는 나약한 것 같으면서도 진심으로 백성들을 사랑하기에 “백성 없는 나라 없고 나라 없는 세자 없다”고 외치면서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할 지도자가 과연 이 시대에 존재할지 의심스럽다. 볼모로 가 있으면서도 우리가 왜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우치고, 기울어가는 명나라에게 무조건 적인 사대를 하며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발달한 청나라 문물의 근원이 되는 서양문물을 들여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던 그 모습을 생각해보면 지금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이 그런 혜안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더더욱 자신을 의심하여 머나먼 타국 땅에서의 볼모생활을 정리하고 고국 땅을 밟는 그 순간에 자신을 떠 받들어 주기를 원하기보다는 아버지 인조의 노여움과 그로 인해서 청나라와 서양문물에 대해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을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그 모습을 이 시대에 보고 싶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