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코노믹리뷰 노연주 기자

“최근 한국 사회를 충격에 몰아 넣고 있는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같은 가상화폐와 고려시대 금속활자의 비극은 오버랩된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혁신적 모델을 구축했음에도 개화하지 못하고 해외에서 개발된 모델이 다시 한국에 진입해 각광을 받는 ‘문화적 사대주의’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 지금 IT 강국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게임 ‘리니지’의 가상화폐 ‘아덴’은 지금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가상화폐의 기원이다.”

신간 <한국형 혁신의 길을 찾다> 서두에 나오는 주장이다. 저자가 묻는다. 왜 우린 혁신을 온전히 우리 걸로 만들지 못했는지를. 과거를 반성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저자가 천착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보편타당한 ‘한국형 혁신’을 이뤄내는 방법론 말이다. 그는 위정현(53)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다. 콘텐츠경영연구소장이자 내년 한국게임학회 제9대 회장으로 취임한다. 서울대를 졸업한 이후 일본 도쿄대 대학원에서 전략경영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온라인게임과 인터넷 비즈니스 연구의 권위자이자 온라인게임 기반 학습법인 G러닝 창시자다. 이코노믹리뷰 인기 칼럼 ‘위교수의 은밀한 게임사생활’을 연재 중이다. 그를 만나러 중앙대를 찾았다.

어디서든 통하는 한국형 혁신 모델

‘모방에서 혁신으로.’ 위 교수가 보는 한국의 산업 발전 단계다. “우린 1990년대 후반까지 모방을 해왔다. 선진국에서 나온 제품을 똑같이 싸고 좋게 만든 게 우리 산업 발전의 역사다. 지금은 다르다. 거의 모든 산업 분야가 변화의 임계점에 와있다. 문제는 다음 단계로 갈 모델이 없다는 거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라서 어떻게 가야할지를 모른다.” 그는 한국이 단순히 남을 모방하는 나라를 뛰어넘어 글로벌 경제를 주도할 혁신국가로 거듭날 단계라고 생각한다.

사진=이코노믹리뷰 노연주 기자

그는 이 지점에서 조건 하나를 내세운다. ‘한국형 혁신’을 ‘정(情) 문화’ 같은 낡은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핵심은 보편성이다. 어느 나라에 적용해도 작동하는 ‘한국형 혁신 모델’을 꿈꾼다. 그래야 혁신을 주도하는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다. 위 교수는 계속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구해왔다. 이를 체계화해야겠단 계획의 결과물이 이번 책이다.

“4차산업혁명의 시대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혁명의 시대’에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수많은 혁신의 싹을 자르고 있지 않은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 책은 이런 고민을 위해 쓰여졌다. 과연 한국은, 한국기업은, 한국사회는 미래 어떤 혁신 모델을 구축해야 하는가? 특히 모방자이자 추격자에서 혁신자로 변신해야 하는 한국이 가져야 할 혁신전략의 모색이 이 책에 있다.”

'혁신의 단초' 정부 무관심 속 태어난 '온라인게임'에

위 교수는 책 1장에서 혁신의 꿈을 품었던 한국 기업이 왜 실패에 직면하고 마는지를 논한다. 다음 장에선 우리보다 앞서 혁신과 실패를 경험한 일본 사례를 검토한다. 다음이 ‘게임’이다. 혁신 경제를 논하는 책 중에 게임 산업 사례가 이토록 비중이 높은 책은 흔치 않다. 그만큼 저자는 한국형 혁신 모델의 단초를 찾는 데 게임 산업이 중요하다 여긴다.

“해외에서 한국 온라인게임 사례에 관심이 대단히 많다. 우리 같은 개발도상국이 IT 부문에서 글로벌 리더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다. 특히나 재벌 중심 경제에서 나온 혁신 아닌가.” 그는 온라인게임 혁신이 정부 무관심 속에 태어났다는 점을 주목했다. “결국 산업 시스템은 정부가 간섭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더군다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엔 정부가 방향을 제시할 수 없기에 그게 더욱 중요한 거다.”

사진=이코노믹리뷰 노연주 기자

위 교수는 지금의 게임 산업이 한국형 혁신을 주도할 거라고 주장하진 않는다. 혁신을 일으켰던 온라인게임 모델을 탐독해 새 모델을 짜자는 뜻이다. 오히려 현재 게임 산업은 한계에 직면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우리 게임 산업은 온라인에서 모바일 플랫폼으로 늦게 넘어갔다. 온라인에서 성공하고 나니까 새 플랫폼으로 넘어가는 걸 주저했다. 그러면서 혁신에 대한 역량이 고갈됐다. 지금은 온라인게임 시절의 야수성을 잃었다. 그 초기단계 활력을 복원해야 한다. 이게 21세기 우리가 만들어야 한 산업모델의 단초다.”

'한국형 혁신의 주체' 길러내지 못하는 교육

위 교수는 우리 역사에서 개인이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고 본다. 조선시대 의병이 그렇다. 한국형 혁신의 주체 역시 개인 또는 소그룹으로 규정한다. 대규모 조직도 소그룹 연합체로 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메바처럼 작은 조직이 서로 협업하며 자율성을 갖는 모델이다. 실제 게임 회사나 인터넷 회사는 그렇게 가고 있다. 재벌 대기업은 정경유착을 넘어 게임·인터넷회사 모델을 참고해 4차 산업혁명에 맞는 전략과 조직을 갖춰야 한다.”

그는 특히 강력한 개인과 인터넷 플랫폼의 만남에 주목한다. "개인이 ICT와 만나면 힘이 극대화된다. 과거엔 개인이 기업을 상대할 수 없었다. 지금은 동등하거나 때로는 힘이 더 세다. 개인이 지닌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인터넷은 지렛대랑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국형 혁신에 유리한 조건이다. 개인이 플랫폼에 올라 혁신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혁신의 주체인 개인은 메시아처럼 갑자기 나타나는가. 아니다. 교육이 중요하다. 위 교수가 책에서 온라인게임 다음에 교육을 화두로 꺼내는 이유다. 그는 “공교육이 제 기능을 못한다”고 단언한다. 과거 제조업 기반 경제에 대응하는 교육 시스템이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공교육 시스템의 목표는 컨베이어벨트 앞에 앉을 블루컬러를 생산하는 거다. “그 시스템은 수명을 다했다. 한국형 혁신 모델을 위해선 교육부터 자유롭고 창의적인 모델로 재편해야 한다.”

사진=이코노믹리뷰 노연주 기자

대학 문제도 언급했다. 특히 학생들에 끊임없는 자극으로 도전을 유발해야 할 교수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교수가 새 시대에 적응 못하고 있다. 새로운 지식을 생산 못한다. 사실은 교수 자체가 사회에서 가장 안정적인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더라. 지식을 리뉴얼하지 않는다. 박사학위 받을 당시에 멈춰있는 게 현실이다.” 대안으로 그는 산업계 인물을 대학이 과감히 흡수하고, 반대로 교수가 산업계로 가는 ‘교류’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 한국형 혁신의 시작

사실 새로운 혁신 모델이 간단명료한 실체로 나타나긴 어렵다. 위 교수가 신간에서 300페이지 넘는 분량으로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지만 결코 완결된 혁신 매뉴얼이 탄생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럼에도 혁신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만은 분명하다. 책을 마무리하는 글인 ‘한국형 리스크 테이커의 조건’엔 이런 문단이 있다.

“팔로워에서 이노베이터로 간다는 것은 그만큼 실패가 많아진다는 걸 의미한다. 팔로워는 모방을 하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높지 않다. 혁신 기업으로 가는 순간 대부분 실패한다. 여기서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실패를 용인해야 한다. 조직 내에서 도전하는 것을 끊임없이 격려해주고, 높이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변화해야 할 중요한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