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고혈압 환자 기준이 바뀌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혼란이 생기고 있다. 지난 13일 미국심장협회(AHA)·미국심장학회(ACC)는 새로운 고혈압 진료 지침을 내놨다. 고혈압 진단 기준을 140/90㎜Hg 이상에서 130/80㎜Hg 이상으로 낮추면서 고혈압 환자 숫자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이 기준이 국내에 적용될 경우 국내에서도 고혈압 환자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약제부담이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대한고혈압학회는  이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약 650만명의 새로운 환자가 나올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혈압 기준은 140/90㎜Hg 이상이다.

고혈압학회는 미국 기준을 무조건 따라가야 하는 것은 아니며 한국인의 특성에 기반한 지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내년 초에 새로운 지침을 발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다수 의료 소비자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지침이 변경되면 고혈압 환자가 새롭게 늘어나 약값을 더 부담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출처=이미지투데이

AHA와 ACC가 새롭게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고협압은 수축기 혈압이 130~139 mmHg 또는 이완기 혈압이 80~89 mmHg로 규정됐다.  이들은 또 기존 고혈압 기준 수축기 혈압 140mmHg 이상 또는 이완기 혈압 90 mmHg을 모두 2기 고혈압으로 격상했다.

 완화된 기준에 따라  혈압이 130~139/80~89 mmHg인 미국인 13.7%가 새롭게 고혈압 인구로 분류된다.  미국의 고혈압 유병률은 31.9%에서 45.6%로 크게 상승하며 약 3100만명의 인구가 새로이 고혈압 환자가 되는 등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관측됐다.

가이드라인은  환자의 치료에도 변화를 준다. 10년 심혈관 사건 발생률이 10% 이상으로 예상되거나 이미 심혈관 질환을 앓은 고위험군이라면 130/80 mmHg 이상이면 약 복용을 적극 권장한다. 심혈관 질환이란 심장이나 혈관에 관련한 모든 질환을 의미한다. 10년 심혈관 사건 발생 위험률이 10% 이하인 일반 환자라면 예전처럼 140/90 mmHg 이상에서 혈압을 조절하라고 권고한다.

고혈압 진료에는 변화가 있을까. 미국 의료진은 기존처럼 진료실에서 의료진이 측정하는 진료실 혈압을 기준으로 치료 방침을 정할 것을 권하고 있다. 집에서 환자가 측정하는 혈압도 되도록 의료진의 모든 결정에 적용하기를 권고한다.

예를 들어 고혈압 약제를 복용하지 않은 환자의 혈압이 130~160mmHg에서 80~100mmHg 사이라면 가정에서 잰 혈압 수치를 고려하고 혈압이 120~129mmHG에서 75~79 mmHg라면 진료실 혈압이 정상이라도 가정 혈압을 측정하기를 미국 의사들은 권유한다.

대한고혈압학회는 이번 기준 완화는 필요 없는 약 사용을 줄여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모든 고혈압 의심 환자에서 활동혈압 측정을 권하는 영국 가이드라인과 비슷한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미국의 새로운 고혈압 가이드라인은 고혈압의 사전 관리를 강조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이번 지침은 지난 2007년 이후 미국의 국립보건원(NIH 산하 National Heart Lung Blood Institute)에서 고위험군 고혈압 환자의 목표 혈압을 확인하기 위한 뇌졸중, 당뇨병 환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철저한 혈압 조절이 조금이라도 좋은 효과가 있었다는 것에 기반한다.

고혈압 환자의 범위가 넓어져 고혈압 환자로 진단받으면서 늘어날 의료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경기도에 거주하는 한 60대 남성은 혈압 130/80㎜Hg로 기존 지침에 따르면 고혈압 환자가 아니지만 새로운 미국 지침에서는 고혈압 환자로 분류된다. 이 남성은 "고혈압 전 단계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없이 살아왔는데 이제와서 고혈압 환자라고 병원에서 진단받는다면 아무래도 약도 복용해야 할 것 같아 걱정된다"면서  "고혈압 약은 계속해서 먹어야 한다던데 고민이 많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고위험군 고혈압 환자에게 적용 약제가 늘어날 수 있다. 미국 지침은 혈압이 140/90 mmHg 이상이라면 초기부터 두 가지 이상의 고혈압 약제를 사용하기를 권유하는데 이는 초기 혈압이 조절 목표에서 20/10 mmHg 이상 높아도 마찬가지다. 물론 혈압을 가정에서든 의료 현장에서든 반복해서 측정한다는 가정 하에서다.

10년 심혈관 사건 발생률 10% 이상인 고위험군 환자가 아닌 일반 고혈압 환자라면 전과 같이 한 가지 약제로 시작해 차츰 조절해 나가는 것이 권고된다.

대한고혈압학회는 고혈압의 효과적 조절이 심부전, 뇌졸중, 심근경색증 등을 막고 사망률꺄지 감소시키므로 어느 국가의 가이드라인도 이전보다 강화된 목표 혈압 설정의 필요성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회는 이어 다만 노인 등 혈압이 낮아지는 현상에 취약할 가능성이 있는 인구에서도 동일한 치료 목표를 설정한 것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계속 연구가 이루어질 것이라면서 우리나라 인구 기반의 자료를 제공할 수 있게 연구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혈압학회 관계자는 “이번 가이드라인의 가장 큰 단점은 수축기 혈압 목표인 130 mmHg은 비록 논란은 있지만 상당한 증거에 기반한 데 비해 이완기 혈압 80 mmHg 이하의 경우 증거가 미약하다”고 밝혔다.

평균적으로 수축기 혈압이 10 mmHg 변화할 때 이완기 혈압은 그 절반인 5 mmHg 정도 변화하는데, 이번 가이드라인에서는 임상 의사의 기억의 편의를 위해 이유로 똑같이 10mmHg를 낮춘 130/80 mmHg로 목표를 설정했다는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이어 “따라서 일선에서의 고혈압 지료에서는 이완기 혈압 보다는 수축기 혈압에 좀 더 중점을 둬 환자를 평가하고 치료 목표를 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고혈압 유병, 진단, 지속치료 인구 추이.분석=대한고혈압학회 고혈압역학연구회, 자료=국민건강영양조사, 국민건강보험 빅데이터.

학회에 따르면 미국 기준에 따른다면 30세 이상 한국인 절반이 고혈압 환자로 분류된다. 2015년 공개된 국민건강영양조사(KNHANES) 자료를 기준으로 하면 30세 이상 성인에서 이전 기준으로는 전체 32.0%, 남자 35.1%, 여자 29.1%가 고혈압으로 분류되지만 새 기준을 적용하면 전체 50.5%, 남자 59.4%, 여자 42.2%가 고혈압 환자에 속한다.

우리나라에서 약 650만명의 고혈압 환자가 새로 생기는 것이다.

대한고혈압학회 관계자는 “새로운 미국지침에 대한 의견을 조율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의) 새로운 지침도 내년 초에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혀 미국 기준을 따를 공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