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대법원은 이낙영 전 SPP그룹 회장의 상고심에서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특경법)상 배임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 전 회장에 대해 원심과 달리 개별 계열사일부 배임혐의를 무죄로 판단하고 사건을 부산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이 무죄 판단을 한 부분은 ‘회사 회생을 위해 자율협약을 맺고 있는 채권단의 승인 없이 계열사끼리 자금을 대여하도록 하고, 여러 계열사가 모기업인 SPP조선을 통해 원자재를 통합 구매하도록 하는 등 현물거래를 하게 한 혐의’로 “그룹 내 계열사 사이의 지원 행위가 계열사들의 공동이익을 위한 것으로, 합리적인 경영 판단의 재량 범위 내에서 행해졌다면 배임의 고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취지다.

대표이사, 임원의 배임죄는 왜 성립할까

기업범죄에 있어 대표이사 등 임원의 배임죄는 ‘기업과의 신임관계를 기초로 기업의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임원이 자신의 임무에 위배되는 배신행위를 하여 임원 자신, 또는 다른 제3자로 하여금 이익을 취득하게 하여 기업에 현실적으로 손해를 가하거나 손해를 발생시킬 위험을 초래한 경우’에 성립한다.

다만, 이 경우 배임혐의를 받는 임원은 자신의 행위가 임무에 위배되는 배신행위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로 인해 기업에 재산상 손해를 발생 또는 발생시킬 염려가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는 이른바 ‘경영판단 원칙’의 항변을 하게 되는데, 이번 사건에서도 대법원은 ‘경영판단 원칙’을 인정해 이 전 회장의 일부 배임혐의에 대한 무죄를 선고하게 된 것이다.

합리적 근거에 의해 성실히 판단했을 때 성립하는 `경영판단 원칙`

지금은 형사사건에서 더 자주 언급되고 있지만, 사실 ‘경영판단 원칙’은 이사 등 임원의 회사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상법 제399조 등)과 관련한 논의로부터 발전되어 온 민사 법리다.

‘경영판단 원칙’이란 이사 등 임원이 회사에 손해를 발생시킨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이 이사 자신의 권한 내에서 경영인으로서의 경험에 따라 합리적 근거에 의하여 회사에게 최대이익이 된다고 성실하게 믿고 판단한 경우라면 그 임원에게는 민사적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말한다.

이러한 ‘경영판단의 원칙’은 그 동안 미국 판례법상으로 확립되어 왔는데, 이 원칙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1) 이사회의 적법한 결의가 있을 것, 2) 이사가 주어진 상황에서 적절하다고 믿을 정도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기대되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절차를 이행할 것, 3) 그 경영판단이 기업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이익과 합치된다는 선의의 마음을 가지고 결의한 것이며 위법하지 않을 것이 요구된다.

또 4) 경영판단의 대상의 대해 이해관계가 없을 것 등의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리의 경우에도 이러한 미국 판례법의 영향으로 비록 이사 등 임원의 회사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상법 제399조 등) 관련 규정에 명시적 기재는 없지만, 법령위반이 아닌 경우에는 ‘경영판단 원칙’이 적용되어 이사 등 임원의 민사적 책임이 면제될 수 있다는 것이 판례와 학설의 공통된 입장이다.

법원, 2004년 대한보증보험 `경영판단 원칙` 첫적용...무죄 판결

더 나아가 법원은 “기업의 경영에는 원천적으로 위험이 내재해 있어서 경영자가 아무런 개인적인 이익을 취할 의도 없이 선의에 기하여 가능한 범위 내에서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기업의 이익에 합치되는 믿음을 가지고 신중하게 결정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그 예측이 빗나가 기업에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면서 “이러한 경우까지 형사적 책임을 묻는다면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은 물론, 정책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도 영업이익의 원천인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어 당해 기업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이 된다”는 점을 들어 민사적 영역에 국한되어 적용되던 ‘경영판단 원칙’의 법리를 형사 영역에까지 확대적용하고 있다(대법원 2004. 10. 28. 선고 2002도3131판결 참조).

실제로 우리 법원은 2004년 대한보증보험이 한보그룹에 특혜성 보증을 섰던 사건에서 “기업 경영에는 원천적으로 위험이 있기 때문에, 경영자가 개인적인 이익을 취할 의도 없이 기업 이익에 합치한다고 믿고 신중하게 결정했다면 결과적으로 기업에 손해가 발생해도 배임죄로 벌할 수 없다”고 판시해 대한보증보험 임원진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배임죄와 관련해 ‘경영판단 원칙’을 형사 사건에 적용한 첫 사례로 꼽히고 있다.

법원, `경영판단 원칙` 적용 적극적이진 않아...내달 22일 롯데 사건 `주목`

그러나 이러한 사례만으로 우리 법원이 이 원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04년 한보그룹 사건 이후 각종 배임 관련 사건에서 기업인들은 ‘경영판단 원칙’의 항변을 해 왔지만, 실무적으로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진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사건과 같이 같은 그룹 내의 계열사 상호 간이나 모회사와 자회사 간에 이루어지는 자금지원 및 보증의 경우에는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한화그룹 CP매입을 가장한 자금 대여 및 지급보증 사건, SK그룹의 SK증권 유상증자 옵션 인수사건, 동아건설의 동아생명 유상증자 참여사건 등 대다수의 사건에서 ‘경영판단 원칙’의 항변이 배척돼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반면, 이 원칙이 받아들여져 일부라도 무죄가 선고된 사건은 태광그룹 계열사 부당지원 사건, 참여연대의 5대그룹 고발사건 등 손에 꼽을 정도로 희소하다.

최근에도 계열사를 통해 롯데피에스넷 주식 매입·유상증자한 행위가 검찰에 의해 업무상 배임으로 기소됐다. 

신동빈 롯데 회장과 변호인단은 ‘롯데피에스넷에 대한 지원은 인터넷은행 사업을 위해 장기적 안목으로 투자하던 회사’라며 ‘경영판단 원칙’의 항변을 하고 있지만, 법원의 이러한 태도에 비추어 다음달 22일 예정된 1심 선고에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질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번 롯데 사건에서 대법원은 기업의 계열사 부당지원과 관련해 계열사들의 공동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인지, 특정인 또는 특정회사의 이익만을 위한 것은 아닌지, 지원 계열사의 선정 및 지원 규모 등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결정된 것인지, 지원행위가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시행된 것인지, 지원하는 계열사가 위험에 상응하는 적절한 보상을 객관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가 쟁점이 된다.

또 지원 받는 회사의 부실 상황과 회생 가능성, 지원하는 회사의 가치 및 자력 등을 ‘경영판단 원칙’을 적용하기 위한 요건으로 제시했지만, 과연 신동빈 롯데회장의 사례가 각 요건에 부합하는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법원의 주관적 판단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업들, 배임혐의 피하는 방법 꼭 알아둬야

상황이 이렇고 보니 기업을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배임혐의를 피하기 위해 어떠한 행위를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경영판단 원칙’적용에 대한 법원의 소극적 태도가 기업에 대한 검찰 기소 남발을 부추기고, 기업의 창의적 경영을 방해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오너 일가 중심의 족벌경영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경영판단 원칙’의 적극적 수용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반대주장도 있다.

‘경영판단 원칙’적용에 대한 법원의 태도가 향후 어떻게 바뀔지는 예측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기업 스스로 투명성을 제고하고 민주적 의사결정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차원에서라도 돌다리를 두들기듯 관련법령과 절차에 따라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의사결정을 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 조태진 법조전문기자 겸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