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협상에는 ‘레드 라인’(더 이상 넘을 수 없는 선)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현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  농산물 협상에 대해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농촌경제연구원 부원장을 지낸 농업전문가로 저명한 최양부 전 농림해양수석 비서관이 문재인 정부에 던지는 조언이다.  당장 농민을 달래기 위해 농산물은 무조건 레드라인이라고 해봐야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얻기 힘들다는 쓴소리다.
최 전 수석은 14일 서울 송파구 오금동 자택 인근 한 음식점에서 가진 이코노믹리뷰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최 전 수석은 김영삼 정부 당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을 주도했던 정책 전문가다. 그는 참여정부에서 아르헨티나 주재 대사로 근무하면서 남미 농축수산업을 연구했고 칠레 농산물 수입에 대비한 물류 시스템을 연구했다.  그는 “협상은 어차피 상대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서 "모든 것이 합의되기 전까지 협상은 끝난게 아니다’라는 격언을 정책 전문가들이 주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협상 결과는 9회 말까지 가 봐야 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 이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재협상과 관련해 설왕설래가 많다. 문재인 정부는 “농산물 분야는 레드라인”이라고 강조했지만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많다. 한 농민 단체는 산업통상자원부가 개최한 공청회 진행을 방해하며 "정부가 농업 추가 개방을 막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내 농업 환경의 체질 개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급격하게 농축수산물 추가 개방이 이뤄지면 한국 농산업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음을 보여준 예다. 

최양부 전 농림해양수석은 이코노믹리뷰 인터뷰에서  “YS(김영삼 대통령)가 대통령 직을 걸고 농산물 개방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결국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과정에서 시장을 열 수밖에 없었다”면서  “협상은 상대방과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협상을 깰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 없이 ‘적극 저지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우루과이 라운드는 갑자기 닥친 농산물 개방 협상이 아니었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꾸준히 논의가 진행됐고 1994년 협상 타결이 이뤄진 농산물 개방 협정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6월에 닥친 농산물 협상 요구를 ‘6월 사태’라고 불렀다. 임기 초부터 엄청난 부담이었다.

최 전 수석은  "누가 총대를 메고 나갈 것이냐가 큰 과제였다. 관료들은 농업 협상을 해본 적이 없었고 정치인들은 아무도 책임지지지 않으려 했다. 결국 해외 사례를 많이 연구한 내가 나설 수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 최양부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촬영=박재성 이코노믹리뷰 기자)

“관(官)주도 협상은 백전백패”

최 전 수석은 “관(官)이 주도하는 협상 풍토를 없애야 한다”고 단언했다.  미국이나 유럽은 통상문제에 해박한 법률가들이 협상을 주도한다. 협정 파트너 간에 합의한 협상문은 사실상 ‘법조문’과 같은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에서는 통상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업계의 대변인이라고 생각하고 나온다. 그런데 우리네 풍토는 다르다. 공무원이 협상을 주도하고, 나머지 업계는 따라오라는 식이다” 고 꼬집었다.

최 전 수석은  “관 주도형 협상은 해외 농업 현장의 분위기를 제대로 읽어낼 수도 없을뿐더러 핑퐁처럼 오가는 전략적 긴장 상태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고 했다.   농업 단체가 FTA를 비롯해 온갖 협상 과정에 볼멘 소리를 내는 이유는 정부가 구도를 짜 놓고 업계는 따라 오라는 권위적 접근 방식 때문이라는 것이다.

 FTA 재협상도 일본이나 미국처럼 관료와 함께 현장 전문가ㆍ법률 전문가가 함께 참여해 협상의 틀을 짜야 한다는 게 최 전 수석의 주장이다.

쌀 문제는 두고두고 고민해야 할 숙제

최 전 수석은 관 주도 협상 풍토를 비판하며 쌀 개방 압력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우루과이라운드기 타결된  1994년 모든 국가들이 ‘쌀 관세화’에 어느 정도 합의했다. 관세 이외의 쌀과 관련된 무역 장벽은 철폐하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농업계의 반발과 국내 여건의 부족함을 근거로 20년 동안 쌀 관세화 적용을 미뤘다.

최 전 수석은  “박근혜정부는 2015년 513% 쌀 관세화를 하겠다고 세계무역기구(WTO)에 의사를 표시했는데, 국가 간에 쌀 관세화와 관련된 협상이 재점화하면 새로운 고난이 시작될 수도 있다” 고 경고했다.  그는  “쌀 관세화와 관련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할 이해관계자는 미국”이라고 지적했다. 호주나 미국과 같이 쌀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국가들은 한국에 더 많은 쌀 수입을 요구할 것이라고 그는 내다봤다.  지금도 쌀이 남아 돌아 처치하기 어려운 국내 시장 여건으로 보았을 때 ‘예고된 악재’인 셈이다. 최 전 수석은 “직불금이나 쌀 수매 자체에 대해 당사국들이 문제 제기를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쌀 시장 자체의 경쟁력은 고민해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내 산업 농업은 이제 대세가 기울고 있다”

최 전 수석은 “식량 증산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 산업 농업은 조금씩 구조조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강력한 친환경농업론자다. 과거에는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작물을 대량생산하는 게 의미가 있었지만 앞으로는 농산물의 가치나 의미에 좀 더 초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 전 수석은 “많이 먹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먹는 게 더 중요한 세상에서 무조건 농업의 규모화와 효율화를 추구하는 산업 농업의 매커니즘을 반성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업화된 농업은 미국이나 중국의 전략에 상대가 안 된다”면서  “생태 농업ㆍ제대로 된 농촌 농업ㆍ도시 농업을 매개로 한 친환경 농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힘줘 말했다.

1945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난 최 전 수석은 서울대학교 농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주리대에서 농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1978년 농촌경제연구원에 발을 들여놓은 부원장을 끝으로 1992년 연구원을 떠났다. 이듬해인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청와대 대통령 농림해양수석비서관으로 농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는 이후 농식품신유통연구원 이사장, 밀양대 석좌교수, 주 아르헨티나 대사 등을 역임하고 2008년부터 경상북도농어업FTA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