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업계 4위 브로드컴이 3위 퀄컴을 인수하기 위해 1050억달러(약 120조원)의 빅딜을 제안했으나 퀄컴이 이를 거부했다.

퀄컴은 13일(현지시간) 이사회 명의로 "브로드컴의 인수 제안을 만장일치로 거부한다"면서 "이번 제안은 브로드컴이 무선 칩 제조 업체를 저가에 구매하려는 움직임"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이번 거래가 성사되면 당국의 반독점 규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제안 자체가 퀄컴의 지배력과 향후 성장 가능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는 점을 분명히했다.

퀄컴의 반발로 ICT 업계 사상 최대의 빅딜은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현재 퀄컴이 처한 상황과 업계 전반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이러한 교착상태가 장기화될 가능성은 없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 출처=브로드컴 사옥

사면초가 퀄컴...인수합병의 당위성은?

퀄컴의 반대로 브로드컴의 인수합병 시도는 당분간 공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호크 탄 브로드컴 최고경영자(CEO)는 성명을 통해 '가능성을 봤다'는 판단이다. 그는 "브로드컴의 인수안은 퀄컴 주주들에게 제공되는 매력적이고 가치 있는 제안"이라며 인수합병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블룸버그를 비롯한 대부분의 외신은 호크 탄 CEO가 퀄컴 대주주들을 상대로 직접 인수합병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각개격파 전략을 택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한 차례 인수합병 시도가 결렬됐으나 호크 탄 CEO의 자신감은 퀄컴이 처한 현재의 어려운 상황, 그리고 업계의 최근 분위기를 고려한 현실적인 전략이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실제로 퀄컴은 위기일발이다. 팹리스 기반의 연구개발 지식특허 비즈니스 모델을 가졌기 때문에 이를 두고 세계 각지에서 특허권 분쟁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애플과의 충돌이 심상치않다. 퀄컴과 애플은 최근 특허권 분쟁을 벌이며 미국에서 격돌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애플은 내년 자사의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퀄컴의 제품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퀄컴 관계자는 "애플이 내년부터 퀄컴의 제품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재 퀄컴의 기술력과 점유율을 고려했을 때 현실적인 방안이 아니다"고 말했으나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최근 두 회사는 기밀문서 탈취건까지 전선을 넓히며 서로를 향한 적대감을 보이고 있다. 블룸버그는 2일(현지시간) 애플이 지난 7월 퀄컴에 칩 기밀자료를 요구했고, 그 복사본이 애플과 협력하고 있는 인텔에 전달됐다는 이유로 퀄컴이 소프트웨어 특허계약 위반 소송을 걸었다는 소식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국내 공정거래위원회와 대만 공정위로부터 과징금 처분을 받은 대목도 애플을 비롯한 제조사 진영과 특허권을 보유한 퀄컴의 싸움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나온다. 바로 삼성전자와 퀄컴의 관계다. 애플이 주도하는 제조업 진영의 퀄컴 압박 수위가 올라가며, 제조업 진영에 속한 삼성전자와 퀄컴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표면적으로 두 회사의 관계는 나쁘지 않다. 기술협력은 지속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9일 퀄컴과 함께 세계 최초의 10나노 공정 기반의 서버 프로세서인 '센트리크(Centriq) 2400'을 출시했다고 밝혔다. 퀄컴 센트릭 2400 프로세서 제품군은 플랫폼급 솔루션을 제공하는 단일칩으로, 삼성의 10나노핀펫(FinFET) 공정 기반으로 설계됐다는 설명이다. 오랜 기간 동안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분야에서 전략적 협력 관계를 유지한 기조가 최소한 내년까지는 이어진다는 뜻이다.

아난드 찬드라세커(Anand Chandrasekher) 퀄컴 데이터센터 테크놀로지 수석 부사장 겸 본부장은 “퀄컴 센트릭 2400 프로세서는 생태계 구현에 노력을 다 한 결과다"고 평가했으며 정은승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 사장도 "고성능에 특화된 삼성전자 10나노핀펫(FinFET) 공정 기술과 퀄컴의 최첨단 시스템온칩(SOC) 디자인이 결합된 서버 프로세서가 데이터센터 서버 시장의 판도를 바꿀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 센트리크 2400. 출처=삼성전자/퀄컴

14일 대만 디지타임스의 보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디지타임스는 조만간 삼성전자가 퀄컴에 스마트폰 통신기술 특허 사용료 지불을 거부하고 새로운 재협상에 임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애플에 이어 삼성전자가 특허료 전쟁에서 퀄컴에 불리한 입장을 선택한다면, 퀄컴의 시가총액은 더욱 떨어지게 된다.

본사를 미국으로 이전하는 브로드컴이 트럼프 행정부의 도움으로 퀄컴 인수합병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물론 브로드컴이 본사를 미국으로 옮기는 이유는 미국 공화당이 추진하는 세재 개편안에 따른 법인세 인하가 주 목적이지만 미국 정부의 환심을 사려는 행보를 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브로케이드 인수를 타진하며 미국 외국인투자위원회 반대에 직면한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려는 다중포석이 깔렸다는 분석도 있다.

심지어 트럼프 행정부가 방대한 특허권을 가진 퀄컴이 흔들리자 사태수습을 위해 브로드컴에 퀄컴 인수합병을 요청했다는 말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애플과 각을 세우고 있는 퀄컴과 달리 브로드컴은 전통적으로 애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기업이기도 하다.

최근 반도체 업계의 합종연횡이 빠르게 진행되는 분위기도 중요하다. NXP가 프리스케일을 인수하고 인텔이 알텔라를, 소프트뱅크는 영국의 암을 손에 넣었다. 초연결 시대가 도래하며 자동차 반도체 시장이 부상하고 있기 때문에 브로드컴이 퀄컴 인수합병에 성공하면 자동차 반도체 업계의 강자인 NXP까지 원스톱으로 품어낼 수 있다.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기반의 이동통신 강자 퀄컴과, 위성항법장치(GPS)와 블루투스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브로드컴의 시너지도 만만치 않다. 나아가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핵심 트렌드인 원칩 솔루션에도 성큼 다가설 수 있다.

▲ 출처=플리커

...더 불러라? 퀄컴의 손에 달렸다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트렌드와 사면초가에 빠진 퀄컴의 상황을 고려하면,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합병은 일정정도 당위성을 가진다. HP 반도체 사업부에서 분사해 다양한 기업을 빨아들이며 성장한 브로드컴의 역사와 더불어 시장의 판도 자체가 '규모의 경제'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퀄컴의 공개입장은 '인수합병 불가'다.

문제는 '인수합병 불가'의 이유로 '낮은 몸값'을 전제로 깔아둔 대목이다. 반도체 업계에 정통한 핵심 관계자는 "퀄컴의 눈으로 지금 상황을 보면 피인수에 관심이 있어도 몸을 사릴 수 밖에 없다"면서  "애플과의 전쟁으로 시가총액이 하락한 상태에서 한국과 대만의 공정위, 나아가 삼성전자 등의 견제로 주가가 더욱 내려가면 말 그대로 헐값에 모든 것을 넘겨야 할 판"이라고 강조했다.

내외부의 리스크가 팽배한 상태에서 브로드컴이 퀄컴 인수합병을 위해 달려드는 것을 우려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는 "퀄컴이 미래가치를 내세워 인수합병 불가 원칙을 고수하는 한편, 상황을 제어할 수 있는 적정수준에 이르러 전격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서도 "퀄컴 인수합병 불가의 원칙으로 퀄컴 스스로가 당국의 독과점을 지적한 것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인수합병이 어렵다.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일종의 암시로도 해석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역대 ICT 역사상 최대의 빅딜인 만큼 예단은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위기에 처한 퀄컴이 독자적인 승부수를 던질 것이냐, 리스크가 사라지면 적절한 선택을 할 것인가에 업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