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라는 이름을 들으면 왕위에도 오르지 못하고 아버지 인조의 묵인 하에 김자점에 의해 독살당한 애처로운 모습이 연상되어 나약한 왕세자로 그리기 쉽다. 하지만 그분의 실제 모습은 강인하고 지혜로운 분으로, 변해가는 주변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감각을 지닌 분이셨다.

필자가 2011년에 펴낸 장편소설 <요동 묵시록>에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는 사실들을 근거로 그려낸 소현세자의 모습이 그분의 실제 모습일 것이다. 필자는 비록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그렸지만, 그 소설에 <조선왕조실록>의 관련기록을 각주로 명시한 이유가 바로 소현세자의 진정한 모습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소현세자의 모습을 짧은 지면을 통해서나마 다시 한 번 조명해 보고 싶다.

1623년 반정으로 인해서 서인들의 손에 이끌려 왕좌에 앉은 인조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즉위 초기의 인조는 그렇게 나약하기만 한 왕은 아니었다.

즉위 초기인 1623년 기자헌 등이 주도한 역모가 있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흥안군을 앞세운 황현 등의 역모가 있었으나 큰 문제없이 제압하고, 1624년에는 이괄의 난으로 공주까지 피난해야 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그 역시 무난하게 제압하고 자신의 왕권을 지킨 왕이다. 그리고 자신의 즉위에 대한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광해임금 정권의 부도덕성을 필두로 들었다. 인목왕후에게 불효하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처형한 것이 반인륜적이라는 것을 내세워 명분을 확립한 것이다. 이것은 반정의 정통성을 만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문제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한 것이었다. 광해임금 당시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를 덧붙인 것이다. 이것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가 뼛속까지 깊이 박힌 서인들에 의해서 주도된 반정이었기 때문에 반정공신들의 의견을 듣지 않을 수 없어서 생긴 일종의 핑계에 불과한 것으로 훗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을 불러들이는 불씨를 만든 것이다.

이미 국운이 기울어가는 명나라의 지는 햇빛을 바라보는 대신들의 눈높이는 빤한 속셈이었다. 명나라와 오랫동안 사대의 의를 맺으면서 그동안 친교라는 명목으로 뇌물을 주어가며 교분을 쌓았던 명나라의 권세가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속해있는 계파의 뒤를 봐 달라는 청탁을 하기가 수월했는데, 후금에는 그럴 만한 대상도 없고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후금을 배척하라고 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결국 나라의 안위는 뒷전이고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챙기는 것이 우선이고, 그들은 그 길을 택했던 것이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이러한 모습들을 보며 성장한 분이다. 그리고 대신들이 주장한 친명배금 정책이 결국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러들였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분이다.

1627년 후금이 형제의 의를 맺을 것을 강요하며, 군사 3만을 이끌고 쳐들어왔던 정묘호란은 정묘화약으로 커다란 상처 없이 마무리 질 수 있었다. 그러나 1636년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조선과의 형제의 의를 군신의 의로 바꿀 것을 요구하는 청나라의 요구에 반대하는 조선을 1637년 1월 1일 탄천에 30만 대군을 집결시키며 몰아붙인 병자호란의 거센 바람 앞에서 조선은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일 전쟁의 시작부터 소현세자의 이야기를 들었거나, 그처럼 백성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있었다면 조선은 병자호란에서 삼배구고두례라는 치욕적인 항복을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청나라의 선봉대 2만은 임경업 장군이 지키고 있는 백마산성을 피해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지 불과 엿새 만에 서울에 진입한다. 그리고 강화로 피신하려던 인조의 일행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남한산성에 머무르면서 청나라의 화친에 대한 요구에 대응한다. 그런데 문제는 화친하기 위해서 왕제와 대신을 보내라는 청나라의 요구에 거짓 왕제를 보냈다가 화친을 위한 일행을 호위하고 갔던 박난영 장군의 목숨만 잃게 했을 뿐, 청나라를 속이고 있다는 것이 들통 나고 만 것이다. 화가 난 청나라는 화친의 조건을 격상시켜 화친을 하려거든 세자를 보내라고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명목만 유지하고 있는 조선의 조정에서는 세자께서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이유로, 전쟁을 해서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쪽과 화친을 하자는 쪽으로 나뉘어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