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으로 금방 울음을 터트릴 듯 억지로 참는 목소리의 앳된 젊은 주부가 전화를 걸어왔다.

“빚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제 남편이 빚을 많이 냈는데, 규모가 얼마인지 정확히 얘기를 안 해줘요. 한 6000만원이 넘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3살짜리 아이를 둔 이 여성은 남편이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던 과정을 아는 대로 털어놓았다.

“카드빚 말고도 더 있어요. 집 사느라 주택담보대출 받은 게 1억5000만원 되는데, 이건 어떻게 해서든 원리금을 갚아나가야 해요. 3살 된 딸을 데리고 길거리를 전전할 순 없잖아요.”

어린 모정은 빚 앞에서 모질어지기로 했다. 전화한 까닭은 6000만원이 넘는 카드빚은 연체가 시작되면 주택 압류로 다가올 거라며, 그 상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였다.

필자는 신용회복위원회에 가서 상담해보는 것이 낫겠다고 조언했다. 프리워크아웃이나 일반워크아웃을 진행하면 집도 압류될 일 없어 보였다. 추심 3개월을 버틸 수 있다면 워크아웃이 나을 텐데, 앳된 모정은 그 시간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신복위요? 전화해봤는데 도움이 안 됐어요. ‘연체 시작해서 한 달이 지나면 그때 연락하세요’ 하고 전화를 끊던데요.”

신용회복위원회 상담은 빚으로 고통받고 있는 채무자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모든 채무자를 상대할 수는 없어 상담 대상자 범위도 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체가 되어야 상담 자격이 생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다.

필자는 “그냥 신복위를 찾아가라. 번호표를 받고 기다렸다가 순서가 오면 상담사 책상 앞에서 상담을 받으시라. 한 달이 지나도 연체를 풀 수 없을 것 같으니, 어떻게 이 상황을 준비해야하는지를 알려달라고 해라. 부부가 같이 가서 상담받고 해결법을 공유하시라. 대출이 많은 주택도 보유하는 게 맞는지도 물어보시라”고 조언하기에 이르렀다.

채무자에게 중요한 단계는 연체 이후가 아니다. 연체 이전 즉 빚을 돌려막기하는 ‘잠재적 파산 상태’다. 이때 억지로 빚을 더 내면 정말로 깊은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다. 불법 사채를 쓰거나 제도권 대출을 받더라도 억지로 끌어냈기에 부채 금액이 크게 늘어나게 된다. 빚을 더 늘리지 않고, 검소한 생활로 조정해야 할 타이밍이기에 이때부터 채무 상담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채무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는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변한 게 별로 없다. ‘포용적 금융’을 외치며 소멸시효 완성채권 소각도 추진하고 법정최고금리 인하도 추진하는 의욕적인 정부지만, 정작 그 산하 금융 공기업, 공공기관은 이전 방식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예금보험공사는 2008년 통장압류를 당해 보증 채무 일부를 상환한 후 정상생활하던 가정주부에게 지난 8월 거의 10년 만에 다시 통장을 압류, 530만원을 인출해갔다. 10년 소멸시효를 불과 한 달 앞둔 가정주부에게 예금보험공사는 시효 연장을 위해 법원으로부터 지급명령 결정문을 받아낸 것이다.

공공기관의 해명은 똑같다. “부채를 갚아야 하는 것 아니냐. 우린 충실히 추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채권자에게 희생을 요구하며 자신의 빚을 갚지 않는 채무자가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장기연체, 시효완성채권을 소각하자는 것은 장기 채무자의 대부분이 빚 갚을 능력이 없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앞선 경우는 본인채무가 아닌 보증채무였는데도, 10년이 지나도 정권이 바뀌어도 추심의 비정함은 옅어지지 않았다. 채무자 입장에 서서 채무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며칠 전 금융 고위당국자와 만난 자리에서 그 이유를 제대로 알게 됐다. 1400조원에 이르는 가계부채 문제와 관련, 대책을 세우기에 앞서 대부업체 관계자들을 만나서 가계부채 문제의 심각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부채대책을 세우느라 대부업체까지 만난 적극성을 칭찬받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고리대금을 하는 채권자들을 만나 의견을 듣는 것이 옳은 태도인가. 부채 대책을 세우는 데 채무자들을 만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엘리트 당국자는 “내 주변에 채무자가 없고, 힘들어 하는 사람이 없어서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고 변명했다. 주변에 채무자가 없겠는가, 단지 감당할 능력이 있는 잘나가는 사람들만 주변에 있을 뿐이지.

이래서야 어떻게 제대로 된, 피부에 와닿는 가계부채 대책이 나올 것인가. 가계부채의 심각성은 채권은행들의 건전성 문제로 비화될 것인가의 문제일 뿐, 채무자들의 삶이 위중해질 수 있을지는 관심이 없는 탓이다. 빚져 본 적 없는 이들이 빚 대책을 세우려 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삶을 잘 모르는 탓이다. “연체가 한 달 지나면 찾아오세요“라는 상담사의 대답 역시 그런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짜놓은 방식에서 나온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