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룸버그가 지난 3일(현지시간)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싱가폴에 위치한 반도체 회사 브로드컴이 퀄컴 인수에 나선다고 보도한 직후, 업계의 관심은 서서히 애플의 행보에 집중되고 있다. 이번 인수 가능성 타진은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지각변동을 잘 보여주는 일대 사건임과 동시에 애플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브로드컴 사옥. 출처=위키미디어

작은거인 브로드컴, 퀄컴에 이어 XNP까지?

브로드컴은 미국의 반도체 회사로 출발했다. 1991년 UCLA 출신인 헨리 사무엘리와 헨리 T. 리콜라스 3세가 창업했으며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시스템 반도체 업계의 강자로 꼽힌다. 다만 지금의 브로드컴은 싱가포르의 아바고가 인수하며 구 브로드컴과 나눠진다. HP의 반도체 사업부에서 분사한 아바고가 지난해 브로드컴을 인수하며 아예 사명을 브로드컴으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현재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서 시스템과 메모리를 통틀어 브로드컴은 인텔과 삼성전자, 퀄컴에 이어 4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시스템 반도체 순위로는 3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공장설비가 없는 팹리스이기 때문에 퀄컴과 비슷한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브로드컴이 퀄컴을 인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라는 질문도 제기된다. 그러나 브로드컴의 시가총액은 1000억달러 수준이 막대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시바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 당시에서도 이름을 올리며 '쩐의 전쟁'에 나서는 여유를 보여주기도 했다. HP 반도체 사업부 분사 후 알바고 시절부터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불리는 특유의 경영방식도 영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 가능성은 일단 '일방향'으로 좁혀진다. 퀄컴의 구체적인 답변이 나오기 전 브로드컴 내부의 의견 조율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브로드컴은 주당 70달러에 퀄컴을 인수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고려하고 있으며, 대부분 현금으로 퀄컴의 환심을 사려는 분위기가 연출된다. 만약 브로드컴이 실제 제안에 나설 경우 1000억달러 이상의 메가딜이 점쳐진다. 반도체 업계 인수합병 역사상 최고액이다.

보도 직후 브로드컴과 퀄컴의 주가는 장 마감 후 12.7%, 5.5%나 뛰었다.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 가능성이 본사 이전 소식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 더욱 눈길을 끈다. 

CNN에 따르면 브로드컴의 혹 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2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참석한 백악관 기자회견에 참석해 본사를 싱가포르에서 미국으로 이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자국 일자리 창출이 최고 가치인 트럼프 대통령이 흡족한 표정으로 "매우 대단한 기업 중 하나"라고 웃는 표정이 그대로 방송을 타기도 했다.

브로드컴이 미국으로 본사를 옮기는 이유는 세금 절감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자국기업의 자국이전을 강하게 주장하는 한편 미국에서 사업하는 외국기업에도 비슷한 잣대를 들이댄 바 있다. 당연히 이를 따르지 않는 기업에는 통상압박이 행해졌고, 브로드컴은 주판알을 튕긴 결과 미국으로의 본사 이전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현재 논의되고 있는 미국 공화당 세재개혁안에 따르면 조만간 기업의 법인세가 기존 35%에서 20% 수준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몸집을 불리는 브로드컴이 미국 정부의 환심을 사려는 행보를 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현재 브로드컴은 브로케이드 인수를 추진하고 있으나 미국 외국인투자위원회의 반대에 직면했다. 그러나 본사를 미국으로 옮기면 외국인투자위원회의 심사를 받지 않아도 된다.

그 연장선에서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 가능성 타진도 설명할 수 있다. 결국 브로드컴이 몸집을 불리는 과정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사업의 비전을 더욱 날카롭게 가다듬고 있기 때문에, 퀄컴 인수에 나서고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 출처=픽사베이

왜 인수에 나섰나

두가지 맥락에서 눈여겨 봐야 한다. 먼저 인수합병의 당위성이다.

현재 반도체 업계는 말 그대로 합종연횡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2015년만 봐도 NXP가 프리스케일을 119억달러에 인수했고 인텔이 알텔라를 167억달러에 손에 넣었다. 아바고의 브로드컴 인수도 2015년 있었으며,  일본의 소프트뱅크는 2016년 영국의 암(ARM)을 318억달러에, 아날로그디바이스도 2016년 리니어를 160억달러에 인수했다. 최근에는 SK하이닉스가 포함된 한미일 연합이 도시바 메모리 사업부를 179억달러에 인수하기도 했다. 불발됐지만 중국의 칭화유니그룹도 마이크론, 샌디스크 인수에 전사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반도체 업계의 합종연횡이 빨라지는 이유는 시장의 비전과 관련이 깊다. 초연결 사물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며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자동차나 서버 등 다양한 영역에서도 반도체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메모리 반도체 슈퍼 장기호황)과 시스템 반도체의 지능형 연결사물기기 시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HP 반도체 사업부에서 분사된 아바고가 브로드컴에 이어 팹리스 업계의 강자 퀄컴을 노리는 '현실'도 중요한 포인트다.

냉정하게 말해 아바고가 브로드컴을 인수한 것 자체도 업계에서는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졌다. 처음 HP 반도체 사업부에서 분사된 후 1999년 애질런트에 인수됐다가 2005년 다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등 사모펀드의 품에 안기며 체력을 길러온 브로드컴이 노리고 있는 퀄컴은 모바일 AP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거물중의 거물이기 때문이다. 절묘한 인수합병으로 외연을 키웠어도 퀄컴은 너무 큰 상대다.

그러나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가 일정정도 당위성을 갖는 이유는, 다름아닌 퀄컴 내부의 사정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현재 퀄컴의 상황이 녹록치않기 때문이다.

▲ 어윈 제이콥스 퀄컴 창업주의 젊은시절 모습. 출처=퀄컴

1968년 통신기술 컨설팅 기업 링카비트(LINKABIT)를 설립했던 어윈 제이콥스 퀄컴 창업주는 영화사에서 삼손의 영원한 뮤즈로 꼽히는 데릴라, 여배우 헤디 라머가 씨앗을 뿌린 CDMA에 집중한다. 그가 개발한 대역확산(Spread Spectrum) 기술은 통신 방해를 피할 수 있는 탁월한 보안성을 자랑했다. 그리고 1995년, 대역확산 이론에 근거한 무선 통신 기술인 CDMA가 퀄컴의 손을 타고 세상의 빛을 보았다. 이후 퀄컴은 CDMA 시장을 확실하게 장악한 후 현재의 모바일 AP 시장을 사실상 제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 퀄컴은 위기에 직면했다. 팹리스 기반의 연구개발 지식특허 비즈니스 모델을 가졌기 때문에 이를 두고 세계 각지에서 특허권 분쟁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주적은 아이폰의 애플이다. 원래 애플은 퀄컴으로부터 독점적으로 모뎁칩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최근 초기 아이폰 모뎀칩 공급을 책임졌던 인피니온을 품은 인텔과 협력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퀄컴이 지급하던 리베이트에서 시작된 갈등이 특허권 분쟁으로 번진 상태다. 노키아와의 특허권 분쟁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빠르게 전장을 좁힌 애플의 레이더망에 퀄컴이 제대로 걸려든 셈이다. 현재 두 회사는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특허권 분쟁은 물론, 국내에서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 이슈에도 깊숙히 개입해 있다.

대만 공정위의 퀄컴 과징금 결정과 경제부의 반대 방침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 그리고 애플과 퀄컴의 분쟁이 기밀정보 탈취 논란으로까지 번지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블룸버그는 2일(현지시간) 애플이 지난 7월 퀄컴에 칩 기밀자료를 요구했고, 그 복사본이 애플과 협력하고 있는 인텔에 전달됐다는 이유로 퀄컴이 소프트웨어 특허계약 위반 소송을 걸었다는 소식을 비중있게 보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애플이 내년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퀄컴칩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힌 상태다. 퀄컴의 시장 장악력과 기술력을 고려하면 현실 가능성은 떨어지지만 퀄컴은 충분한 압박을 받을 수 있다.

결국 퀄컴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상태에서 브로드컴이 본사를 미국으로 옮기며 빅딜을 성사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평가다. 브로드컴이 애플과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기업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월스트리트저널은 3일(현지시간) "브로드컴이 퀄컴을 인수할 경우 애플과 퀄컴 분쟁해결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NXP까지...자동차 눈길

일각에서는 브로드컴이 본사 미국 이전 소식 직후 퀄컴 인수설을 흘린 점에 주목하며 '백악관이 부탁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애플과 퀄컴의 분쟁이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브로드컴이 퀄컴을 인수해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논리다. 다만 이 논리는 현 상황으로는 추정일 뿐이다.

아직 정식으로 퀄컴에 제안이 가지는 않았으나, 만약 브로드컴이 퀄컴을 인수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업계로 보면 반도체 시장의 합종연횡이 더욱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나아가 각 국가의 반독점 심사 규정을 이겨냈다는 상징성도 확보할 수 있다.

▲ 출처=픽사베이

NXP가 프리스케일을 인수하며 자동차 반도체칩 1위 기업으로 뛰어오른 상태에서 퀄컴이 NXP 인수를 진행하는 대목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만약 브로드컴이 퀄컴 인수에 성공하면 프리스케일과 NXP까지 확보, 명실상부 자동차 반도체 시장을 석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때 삼성전자도 인수합병을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NXP는 필립스의 부품 사업부에서 독립한 곳이며 자동차 반도체 업계의 강자다.

자율주행차로 대표되는 자동차의 미래 가치는 플랫폼에 있다. 브로드컴이 시스템 반도체 시장 장악을 넘어 그 이상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율주행차 경쟁이 글로벌 ICT 업계를 뜨겁게 달구는 상황에서 브로드컴과 애플이 현재의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면, 미래 자율주행차 경쟁의 판도가 변할 가능성도 있다. 삼성전자가 하만을 인수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애플이 퀄컴을 인수한 브로드컴을 통해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엔비디아가 자율주행 및 플랫폼 기술력을 키우고 인텔이 지난 8월 모빌아이를 인수한 것과 흡사하다.

이 역시 브로드컴과 퀄컴 인수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