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1일, 한중 양국이 ‘양국관계 정상화’의 내용을 담은 합의문을 발표했다. 사드 문제로 인해서 한·중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합의문은 양국 관계 개선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협상학 관점에서 보면 아쉬운 점이 적지 않다.

합의문의 주요 골자는 ‘MD 구축’,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협력’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중국이 요구하는 의제다. 양국관계 정상화를 위한 합의문 그 어디에도 한국 측이 요구한 의제는 없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달 30일 정례브리핑에서 “한국이 약속을 지키길 바란다”고 언급했고, 중국 매체들은 중국 측 대변인의 발언을 받아 ‘한국의 약속’이라고 잇따라 보도했다. 사드배치 문제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고자 급하게 의제를 건네받고 협상을 진행한 것이 가장 아쉬운 점이다.

협상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시간이 부족하면 상대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문 협상이 그 대표적이다. 당시 합의에서 양국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단을 한국 정부가 설립하고, 일본 측에서 이 재단에 10억엔을 출연하는 내용에도 합의했다. 하지만 일본은 단순히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국가로서의 법적인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합의문이 작성돼 아직도 국민적 비판을 받고 있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해서, 일단 급한 불만 끄고 보자는 식의 협상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인 협상이 2000년 한·중 마늘 분쟁이다. 2000년 6월 우리 정부가 농가 보호를 명분으로 중국산 냉동 및 초산 마늘에 적용하는 관세율을 10배 이상 올리자 중국 정부가 우리의 주력 수출품인 휴대폰과 폴리에틸렌 수입금지라는 터무니없는 보복조치를 취했다. 900만달러 규모의 마늘 수입을 막았다가 5억달러 규모의 수출길이 막힌 것이다. 중국 조치는 국제법마저 무시한 무역 보복이었음에도 우리 정부는 중국이 강경책을 편 지 1개월 만에 베이징 협상에서 백기 투항하고 말았다. 국내 마늘 소비량의 5%에 해당하는 1만4000t의 마늘을 해마다 의무적으로 수입해주고 관세율도 인하하기로 중국에 약속했다. 중국산 마늘에 고율 관세 부과 이전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중국은 그런 나라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 25주년을 맞지만, 양국 관계는 25년이라는 세월을 논하기에는 옹색하기 짝이 없다.

의제 선정에 주도권이 빼앗겼어도 협상 시에 한국 측 의제를 추가할 수 있다. KDB산업은행은 중국의 사드 보복에 따른 경제손실 규모를 22조4000억원이라고 추산했다. 이번 사드보복으로 인한 한국 측의 경제손실이 큰 만큼 비슷한 형태의 상황이 도래되더라도 ‘경제적 보복 행위는 하지 않겠다’라는 조항이 명시되어야 했다. 2013년 남·북 개성공단협상에서 한국 측 신변 안전 보장과 재발방지 대책에 합의한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강력한 욕구(Interest)는 북한의 비핵화다. 이는 중국도 다르지 않다. 한국이 ‘MD 구축’, ‘사드 추가 배치’, ‘한미일 군사협력’에 합의하는 조건으로 중국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다각적 노력을 하겠다는 구체적 조건을 명시해야했다.

중국은 고대부터 선쟁후화(先爭後和)를 중요한 협상 방법으로 삼았다. 먼저 경쟁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고 후에 화합하여 합의에 이르는 방법이다. 일단 위기를 자초하더라고 모험을 걸고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수위를 조절하며 원하는 것을 달성해 나가는 것이다. 이번 한·중 합의문 역시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 병원에서는 아무것도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디는 무기 하나 없이 강력한 제국주의 세력인 대영제국으로부터 인도를 해방시켰다. 결국 진정한 약자란 더 이상 자신에게 아무런 파워가 없다고 인정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