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년 전과 비교해 업종도 많이 늘었을 뿐만 아니라 변화도 많았다. 산업이 세분되면서 틈새시장들이 계속 생긴다. 새롭게 조성된 업종은 처음에 있는 듯 없는 듯 보이다가도 한참 지나서 보면 당당히 새 시장을 형성하고 어마어마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예전엔 아웃도어 의류라는 말조차 없었다. 그저 등산복 정도로 통용되었지만, 기능성이 뛰어난 옷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해외 유명 브랜드들이 진출하면서 시장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시장 규모도 수조원 이상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아웃도어 의류 시장이 한창 팽창하던 시기에는 어느 틈엔가 새 해외 브랜드가 국내에 진출하는가 하면 새로운 국내 브랜드들도 앞다투어 시장에 뛰어 들었다. 아마 최근 10년간 전 세계에서 아웃도어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이 우리나라였을 것이다. 미국, 캐나다, 스위스, 프랑스, 독일, 스웨덴, 이탈리아 등 산에 좀 다닌다는 사람들은 그 브랜드 이름만 들어도 입을 쩍 벌릴 만한 명품 브랜드들이 국내에서는 정말 치열하게 경쟁을 해댔다. 이렇게 많은 브랜드들이 각축전을 벌인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산업이 고도화되면서 예전에는 별개의 시장이나 업종으로 볼 수 없던 것들이 새로 등장하고 성장하고 발전해 나간다. 그러면서 그런 틈바구니에서 또 새 업종이 등장한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운 자신만의 플레이그라운드를 만들고 싶어 한다. 새로 개척하는 업종에서 먼저 치고 나가야 선두주자가 된다. 어떤 분야든 선두주자는 여러모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주말 내내 발품 팔아 회사를 위기에서 건져

필자가 거쳐온 회사들도 업종 내에서 선두기업이거나 얼마 전까지 선두기업이던 곳이었다. 지금도 선두기업인 곳은 건자재 쪽이고 얼마 전까지 선두였던 곳은 전선 쪽이다. 그런데 커뮤니케이터 입장에서는 선두기업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업종 전체가 여론의 질타를 받는 경우도 생기는데, 1등 기업이 대표로 욕을 먹기 마련이다.

관행적으로 내려오던 ‘담합’과 같이 불명예스러운 일에서도 당연히 업종을 대표해 욕을 먹는다. 때문에 1등 기업의 커뮤니케이터는 항상 긴장해야 한다. 몇 년에 한 번씩은 담합 같은 일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검찰 조사, 추징금 같은 일들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언론과 여론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한 번은 건자재 쪽 업종에서 19개 기업이 담합행위로 추징금이 부과된 적이 있었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나오는 보도자료를 보더라도 1등부터 해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순위의 기업은 기업명을 나열하지만 그 뒤에 있는 기업들은 ‘등’으로 마무리된다. 당시 처음 경험하는 것이라 더 긴장했다. 초반에 제대로 손 쓰지 못하면 힘들어지는 상황이었기에 더했다. 기사가 나오기 전 맨 먼저 달려간 곳이 통신사였다.

 

“1등 회사 이름을 빼고 어떻게 기사 제목을 뽑냐?”

말도 안 되는 부탁임을 알았지만 일단 찾아가 매달렸다. 결국 여러 가지 정상 참작이 되어 제목에서는 기업명이 빠졌다. 일단 큰 산을 넘은 셈이었다. 다음부터는 조금 수월했다. 이미 통신사에서 써 먹은 논리를 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하지만 종합일간지와 경제일간지 각종 온라인 매체와 주간지 등 남아 있는 매체들이 어마어마했다.

불안 속에서 토요일을 보내고 난 뒤 일요일 오전부터 전 매체를 돌기 시작했다. 일단 기업 소식을 주로 전하는 경제지에 집중했다. 편집국은 생각보다 휑하고 담당자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헤매고 다니는 모습이 딱했는지 신경들을 써 줬다. 쉽지 않았지만 또 큰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여론에 미치는 작은 영향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성취감은 적지 않았다.

담합으로 거론된 다른 기업들은 어땠을까? 1등이 기사 제목에 거론되지 않는데 2등부터는 말할 필요도 없다. 가만히 있어도 손해 볼 것 없다. 업종 내 1등 기업들은 이런 것을 감내해야 한다. 그깟 기사 제목에서 회사 이름이 거론되는 것과 아닌 것이 어떤 차이가 있냐고 하겠지만 그 영향력은 상상외로 크다. 일단 네이버로 뭔가 검색을 해보시길,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가끔 묘한 제안을 받을 경우도 있다. 기자들이 기업에 대한 문제점을 파기 위해 경쟁사에 연락하여 내용을 파악하는 일이 있다. 의도적으로 경쟁 업체의 약점을 추적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경쟁사를 깎아내리는 기사가 나간다면 단기적으로는 경쟁업체를 이기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결국 그 업종의 전체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일이 된다. 때문에 커뮤니케이터는 결코 자기 기업의 이익만 탐해서는 안 된다.

2011년 2분기 실적발표가 있을 무렵이었는데, 몇몇 매체 베테랑 기자들이 연락을 해왔다.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은 우리 회사가 아니라 얄미운 경쟁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내용인즉슨 ‘경쟁사 지주회사의 2분기 실적에서 무려 500억원이 넘는 금액이 대규모 손실로 반영되었는데, 그러잖아도 벼르고 있던 참에 그 회사를 씹을 수 있는 내용이면 뭐든지 좀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기에 그 기자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는데, 좀 의아했다. ‘웬만해서는 기업을 조지려고 하는 사람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능청스런 말로 시간을 끌면서 의도를 계속 파악했다. ‘이참에 단단히 손을 좀 봐야겠어’라고 벼르는 기자에게 시간을 좀 달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얄미운 경쟁사 험담, 돌고돌아 내 발등 찍는다

공시 자료를 뒤져서 살펴도 보고 회사 내의 선배들에게 자문도 구하면서 내용을 파악해 나갔다. 결론은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장거리 해저케이블을 설치하고 있었는데, 해저케이블이라는 것이 육지의 전력케이블과는 달라서 케이블들을 이어 붙이지 않고 수십 킬로미터 이상 길이의 케이블을 해저에 설치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케이블을 설치할 때 하필이면 태풍 ‘뎬무’가 왔다. 가공할 만한 뎬무의 위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케이블을 끊고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케이블을 끊는다는 것은 엄청난 손실을 의미했다. 재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공사기간도 기간이지만 일단 끊어진 케이블은 재사용할 수 없기에 그 때문에 발생한 손실 규모만 수백억원에 이르렀다.

국내 해저케이블이 처음 설치된 때는 1998년이다. 당시 국내 기술로는 어림도 없어서 프랑스의 전선회사가 설치했다. 때문에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에 계속 적잖은 외화가 지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십여 년 뒤인 2010년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선두권 해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이긴 국내 기업인 경쟁사가 그 사업을 진행하게 됐다. 물론 우리 회사도 해저케이블은 개발해놓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 그 사업분야에 뛰어들어야 했다.

곰곰이 생각을 정리한 뒤에 전화했다. 경쟁사의 상황을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기자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경쟁사의 상황을 이해해 주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기자는 의아해 했다. 얄미운 1등 기업의 약점을 파고 들기 위해서 2등인 경쟁사의 담당에게 물었는데, 의외로 기대와는 정반대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었다.

“천재지변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추가적인 위기를 막았던 것은 잘한 것입니다. 거기서 발생한 손실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그런 결단을 하지 못했다면 케이블은 케이블대로 못 쓰게 되고, 인명 피해와 함께 더 큰 손실이 닥쳤을 것이 뻔합니다. 그랬다면 다음부터 세계 시장에서 누가 해저케이블 프로젝트를 한국 기업에게 주겠습니까? 긍정적으로 봐 주셔야 합니다.”

기자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특종을 잡았다고 생각했고 여기에 경쟁사에서 제보하는 문제점들을 더 엮어서 한방 제대로 터뜨리고자 했다. 그런데 오히려 경쟁사 담당자가 더 간곡하게 변론을 하고 나서서 어리둥절해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얘기하는 태도를 마뜩찮아 했다.

“자기 회사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까지 얘기하세요?”

“아닙니다. 아셔야 될 것은 정확하게 아셔야죠.”

계속된 변론에 기자도 결국 이해해 주었고 기사는 밸런스가 잡혀 나갔다. 지금 그 전선회사는 그때 해저케이블 프로젝트에서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해저케이블 사업이 적자 주범에서 효자사업부로 탈바꿈했고 중동, 미주 및 유럽 등지에서도 수주를 이어가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해저케이블 분야는 우리 회사도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다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기업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이어서 경쟁사가 먼저 치고 나갔다. 사실은 부럽고 배가 아팠다. 하지만 커뮤니케이터의 입장에서는 그 업과 시장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무도 몰라준다 하더라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했다. 당시엔 작고 하찮아 보일지 모르나 지나고 보면 산업의 국가 경쟁력과도 이어질 수 있다.

심심찮게 대두되는 문제들이 알고 보면 경쟁사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드는 사건인 경우도 많다. 한 예로 ‘하이마트 정품 논란’이 있다. 드러내 놓고 물어보기도 뭐하지만 뒤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하이마트에서 파는 제품들은 정품이 아니다. 동일 제품도 중국산 값싼 부품들이라 싸게 판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설마 삼성전자와 엘지전자가 정상 제품 따로 만들고, 하이마트에 납품할 비정상제품을 따로 만들까 하는 생각이 당연하다. 그런데 세간의 의구심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급기야 하이마트 측에서는 신고포상금을 내걸고 캠페인까지 벌였다. ‘경쟁사 측에서 슬쩍 언급하는 사례를 증거로 제출하면 포상하겠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중국의 전자제품들도 범람을 하고 있어 이런 구도가 의미 없어 보이지만, 그 루머가 완전히 사라졌는지는 의문이다.

말만 들어도 미간이 찌푸려지는 내용이지만 2011년 제과업계에서 경쟁사를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쥐 식빵’ 사건을 일으켰다. 나중에 경쟁업체 대리점 관계자가 저지른 것으로 판명되면서 자칫 ‘식품관련 대형 파동’이 될 뻔하다가 겨우 잠잠해졌다.

무한경쟁 시대에서 기업들은 가끔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고, 때론 비방과 흑색선전을 하는 일도 있다. 기업의 약점을 들추는 데에 경쟁 관계 구도를 이용하는 것이 손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커뮤니케이터라면 일부러 경쟁사에 흠집을 내거나 비방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당장은 경쟁사가 욕을 먹겠지만 결국은 함께 가야 할 길에 스스로가 오물을 던지는 것과 같다. 커뮤니케이터는 자신이 근무하는 기업뿐만 아니라 그 기업이 속해 있는 업계를 지켜야 할 의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