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0년 중국 명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명나라는 ‘4대 암군(暗君)’ 중 하나라는 가정제(嘉靖帝)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국정에서 손을 놓고 신비한 양생술(養生述) 같은 것에 빠져 매일 장생약(長生藥)을 제조하고 살았다. 당시 중국은 안팎으로 극도의 혼란기였다. 북으로는 몽고군이 국경을 침입하며 안보를 위협했고, 남으로는 왜구가 쳐들어와 농민들의 삶을 유린했다. 조정은 철저한 환관 통치와 부패로 지방관들의 착복이 심했다. 무능한 황제는 80살 먹은 내각수반 엄숭(嚴嵩)이라는 인물에게 정치를 맡기고 현실을 외면해 버렸다.

엄숭의 가장 큰 고민은 재정파탄이었다. 명나라가 수십 년 간 전쟁을 거듭하면서 정부를 유지할 수 있는 은자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응당 중앙으로 바쳐야 할 세금도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급기야 엄숭의 아들 엄세번(嚴世藩)이 묘안을 냈다. 포르투갈, 영국 등의 상인들이 비싸게 사 가는 비단 품목 생산을 늘려 은자를 구하자는 식이었다.

엄숭은 가정제를 구슬려서 곡창지대인 절강성과 강소성 일대에 교지를 내렸다. 그리고 일대의 논들을 뽕밭으로 전환해 지역의 비단 생산량을 연간 200만 필까지 늘일 계획을 세웠다. 당시 명나라 안에서 비단 한 필을 팔면 6냥이었는데, 서양에 팔면 한 필 당 15냥까지 벌 수 있었다. 엄숭의 입장에서는 국가 재정 파탄도 극복하고 자기 몫도 챙길 수 있는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였다.

▲ 곡창지대의 논을 뽕밭으로 바꾸려 했던 명나라 재상 엄숭(출처=베이징관광국)

그러나 절강 총독은 엄씨 부자의 정책에 반대했다. 명나라 당시 뽕 재배는 기술 도입이 어렵고 종자 값이 비싸 일반 농민들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분야였다. 논을 뽕밭으로 바꾸려면 소농들이 대지주들에게 헐값에 땅을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엄씨 부자는 군대를 내려 보내 농민들을 을러 가며 작목 전환을 강요했다. 그리고 반대가 심한 농민들은 왜구 앞잡이로 몰아 형벌에 처해가며 정부 정책에 협조하도록 강요했다. 화가 난 절강 총독은 왜구 진압군에게 호소해 엄씨 부자의 폭거를 막으려고 애썼다.

명분도 실리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엄씨 부자는 결국 간교한 술수를 썼다. 1561년 1월부터 강에 물이 많은 단오절까지 저수지에 농업용수를 채웠다가 아무도 모르게 한꺼번에 둑을 터뜨리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성공했고, 절강성 내 7개 지역에 홍수가 나 의도하지 않게 논이 뽕밭으로 바뀌었다.

500년 전 명나라에서 있었던 일이 영 멀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수 년째 농업계에서 강조되고 있는 ‘6차산업’ 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간 농식품부는 부가가치율이 높으니 재배와 가공, 유통까지 종합적으로 상품화할 수 있는 6차산업을 시도해 보라고 농가들에게 권유해 왔다. 그러나 일반 농민 입장에서 적게는 1억원, 많게는 10억원 넘게 들어가는 6차 산업 투자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기술도 없고 말이다. 한 평생 외길만 걸어왔던 이들에게 신기술이 필요한 분야에 종사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혹자는 6차산업이 농업개방에 이어 '제2의 폭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농업 자체가 첨단 산업으로 쏠리다 보면, 묵묵히 전통적인 농사를 지어왔던 대부분의 고령 농민들은 시장화의 흐름 속에서 사장될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농업에는 경제적 가치 말고도 사회적 가치가 숨어 있다. 한 농민의 삶이 담겨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안전망으로서의 기능도 있다. 기자가 얼마 전 만난 황철주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은 "2차, 3차 산업에서 피 튀기는 경쟁을 하고, 1차 산업에서는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살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해 주기도 했다. 

농민들에게 꿈만 같은 ‘창의적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라 그들이 조금이라도 현실적인 먹거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은 아닌가 고민해 본다. 누군가 웃으면 누군가는 철저히 울게 돼 있는 산업의 경험칙이 농업에서는 좀 예외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