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과의 합병 무효소송을 기각하면서 삼성이 한숨을 돌렸다. 일성신약 등 주주 5명이지난해 2월 제기한 소송이 일단락되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안정된 그룹 지배력을 바탕으로 삼성 경쟁력 강화를 위한 ‘뉴삼성’ 작업을 본격화할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물산 소송서 삼성 손들어준 재판부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6부(함종식 부장판사)는 19일 삼성물산의 옛 주주인 일성신약이 삼성물산을 상대로 낸 합병 무효 소송에서 “합병 절차에 위법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일성신약이 삼성물산을 상대로 낸 합병 무효의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삼성물산의 주주인 일성신약과 소액주주들은 지난해 2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제일모직에 유리하게 합병 비율이 결정되는 등의 사유로 인해 무효라며 법원에 소송을 냈다. 삼성물산은 제일모직 인수시 회사 주가를 바탕으로 1주당 5만7234원을 제시했으나 일성신약 등은 너무 낮다며 법원에 합병 무효 소송과 함께 별도의 가격 조정을 신청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합병 무렵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경영상황에 비춰 제출된 증거만으로 합병이 옛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손해를 준다고 볼 수 없다”면서 “삼성물산 합병에 총수의 지배력 강화 목적이 수반됐다고 해서 합병 목적이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포괄적 승계 작업이라고 해도 경영권 승계가 유일한 목적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면서 “특정인의 지배력 강화가 법적으로 금지돼 있지 않아 합병에 지배력 강화를 위한 목적이 수반됐다고 해도 그 목적이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법원은 이와 함께 당시 삼성물산 주주로서 제일모직과의 합병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 국민연금공단의 합병찬성 의결권 행사도 법을 어긴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의결권 행사시 상급기관인 보건복지부나 기금운용본부장의 개입을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다”면서 “국민연금공단의 합병 찬성 의결권 행사는 아무런 흠이 없어, 만약 손실이 있다면 공단의 내부적인 규정에 따라 해결할 문제지 재판부가 판단할 몫이 아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설령 최 이사장이 의사결정과정의 하자를 알았더라도 합병 안건의 의사 표시는 내심이 아닌 표시를 기준으로 효력 유무를 판단하는 것이 타당해 이를 주총 결의의 무효 사유로 삼을 수 없다”면서 “투자위원회 찬성 의결 자체가 거액의 투자 손실을 감수하거나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등 배임 요소가 있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밝혔다.

전문가 “원칙 적용한 당연한 판결”

▲ 조태진 변호사.(이코노믹리뷰 법조전문기자)

재판부의 이 같은 판결은 합병무효 소송에 대하여 법원이 그 동안 견지해 온 원칙을 그대로 적용한 결과라는 평가가 나왔다.

법무법인 서로의 조태진 변호사는 “일성신약은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1심 유죄 선고가 이번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선고를 지연시켜 왔지만, 재판부는 이재용 부회장의 유죄 판결에 구애받지 않고 원칙에 입각한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 변호사는 “합병이 무효냐 아니냐는 것은 ‘합병가액 및 합병비율을 정하는 과정에서 하자가 있었는지 여부’만을 고려하는 것이지 ‘합병을 하게 된 본래 의도가 무엇이었느냐’는 결정적으로 고려할만한 요소는 아니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재판부가 국민연금관리공단이 합병 찬성 의결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는 특별한 의사표시 상의 하자가 없었다고 판단한 것에 대해 “의사표시는 ‘일정한 법률효과가 발생하기를 원하는 내심의 의사’와 ‘이를 외부에 표시하는 행위’로 분리할 수 있는데, 양자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거래상의 안전을 위해 외부에 표시된 대로 법률효과가 발생한다고 보고, 거기에는 의사표시 상의 하자가 없다고 보는 것이 법원의 기본인식  태도”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의 합병무효 소송과 이재용 부회장의 형사 소송은 사실관계가 같은 사건일망정 논의의 국면이 달라 서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관계라고 강조했다. 조 변호사는 이어 “이재용 부회장이 형사적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고 해 그와 관련된 모든 사건들조차도 일괄로 무효라는 주장은 형사사건과 민사사건을 전혀 구분하지 못한 논리”라고 지적하고 “원고인 일성제약은 재판부로부터 판결문을 송달받고 14일 이내에 항소가 가능하지만, 항소심에서 결론을 뒤집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로운 접근과 준비가 필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재용 부회장 영향력 견고해질 듯

이번 판결로 이재용 부회장이 추진해온 그룹의 경쟁력 강화 작업인 '뉴 삼성'이 탄력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으로 평가된다. 이 부회장의 그룹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견고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그룹의 3대 축은 전자와 생명, 물산인데 물산 합병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해소되면서 이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부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는 물산의 지분 31.17%를 보유하고 있다. 또 물산은 전자 지분 4%, 삼성생명 19.3%, 삼성SDS 17.1%, 바이오로직스 43.44%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또 삼성생명은 삼성전자(8.54%)를 비롯해 삼성카드, 삼성화재, 삼성증권 등 삼성의 금융계열사를 순환 지배하고 있다.

아울러 그룹 컨트롤타워 구실을 한 미래전략실이 없어진 이후 구심점이 없던 삼성그룹의 경영도 전자와 생명, 물산 등이 분야별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면서 조직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도 벌써부터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