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야말로 인간을 소외로 몰고 가는 근본적인 틀임을 강조하고, 이를 넘어서고자 할 때 인간 개인의 내면적 해방과 사회구조의 변혁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에리히 프롬은 역설한다. 현대의 산업사회에서는 물질만능의 감각적인 쾌락을 무한정하게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너무 높은 목표를 설정해 이를 달성하지 못한 좌절감에 빠질 때, 진정으로 행복해지지 못하고 ‘성장피로증’인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조선시대는 유교사회로 남과 이웃에 대한 배려와 양보가 가장 중요한 가치였으며 지적으로 훌륭한 인격자를 존중하는 것이 사회통념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서구의 물질 만능주의가 유입되며 능력이 우선적인 가치로 인정되고 경쟁에서 이기는 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가치의 혼란이 왔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각자의 개성과 정신적 유산은 사라지고, 적자생존(適者生存)만이 유일한 목표인 이른바 동물의 왕국이 되어 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삶에 중요한 정신적 가치가 무너지고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즉 물질이 삶의 목표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바뀌어버린 전도몽상(顚倒夢想)의 괴리감과 소외감에 괴로워하게 된 것이다. 심하면 자신도 모르게 패배자의 모습인 변태 혹은 인격파괴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소양인은 삶의 과정에서 인내를 가지고 고통을 이겨가며 한 단계 한 단계 능력을 배양하며 그 가운데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결과만 중요시하면 가짜 능력으로 과장되게 살 수 있다. 그러다 자신의 삶이 ‘꼭두각시놀음’일뿐 자신이 갖고 있는 본질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적개심을 가지게 된다. 즉 이성의 힘, 사랑의 힘, 예술·지적 창조의 힘 등 모든 본질적인 힘이 표현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진정한 만족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극복해야 하는 욕망, 감정, 결점, 비정적인 콤플렉스 등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스트레스 해소의 대상을 외부에 전가하는 투사(投射)의 정신적 기제를 쓰다 보니 화가 나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소양인은 모든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자신을 성찰하며 지나간 과정에 대한 철저한 분석으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 늘 자신을 돌아보는 깨달음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사회적 지탄을 받지 않는다.

소음인은 ‘존재에 대한 의심병’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 아닌 소유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사랑 속에 빠져 그 속박에 사로잡힐 뿐 진정한 자신의 판단이 아닌 남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기본적으로 소음인은 존재감이 낮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맞는 멘토를 발견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순종하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목표보다는 상대방이 싫어하면 하지 않고, 상대방이 좋아하면 너무 쉽게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예로 학창시절 어느 과목 선생님이 좋으면 그 과목만 열심히 하고 싫어하는 선생님의 과목은 소홀히 해 전체적인 성적이 들쭉날쭉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을 상대방이나 토론에 적극적으로 표현하면서 상대방이 자신을 싫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무릅쓰고라도 자기 의사를 반영하는 훈련을 해야 우울증을 면할 수 있다.

태음인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도구화’해서라도 소유하려는 사고 패턴을 벗어나야 한다. 즉 사람을 부려먹는 것을 배워 자기 목적을 요령 있게 쟁취하는데, 이를 좋은 말로 ‘인간경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가 지나쳐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사회의 지탄을 받을 수 있다. 항상 자신에게 넘치는 것은 남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베풀며 살아야 스트레스도 덜 받고 수전노에서 벗어나 더 큰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현대 산업사회의 경쟁굴레 속에서 받는 강박 스트레스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떠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가활동도 일종의 소비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예로 핸드폰, TV, 자동차, 애완동물, 여행, 섹스 등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인본주의적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건전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삶의 보람이라는 것이 에리히 프롬의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