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목숨을 걸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뛰어들어야 활로가 보일 때가 있습니다. 무수한 세계 전쟁사에서 증명된 법칙입니다. 실제로 중세 유럽, 중근동에 구축된 십자군 영지를 공격한 살라딘이 주도한 하틴전투에서 유럽인들은 이스라엘의 왕까지 사로잡히는 처참한 실패를 겪었으나 영주 벨리앙 이벨린은 유일하게 마지막 순간 목숨을 걸어 총공세를 펼쳐 탈출하는데 성공했어요. 이후 그는 이스라엘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역할을 맡고  백성들을 안전하게 데려가는데 성공하지요. '목숨을 걸다, 살아남다, 이후의 큰 대업을 이루다'

 

갑자기 왜 십자군 이야기냐. 12일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정감사에서 확인된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의 종교는 잘 모르지만, 당연히 박 사장은 십자군이 아닙니다. 의원들이 영웅 살라딘도 아니죠. 게다가 국감장에 증인으로 나온다고 목숨을 거는 것도 아닙니다. 박 사장이 엄청난 대업을 이뤘다? 더 두고봐야 합니다.

쓸데없는 '박비어천가'를 부를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면돌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는 분명 세계 전쟁사의 오래된 법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첫 국감이 열리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증인출석 이슈가 화두로 부상하고 있어요. 꽤 오래된 일이지만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맥락없는 호통만 치는 국회의원, 어려운 상황을 면피하려는 증인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어요.

국회 과통위 국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증인 출석 문제를 두고 여야의원들의 성토가 이어졌습니다. 이해진 네이버 전 의장은 8월말부터 해외에 있고 지금은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답니다. 김범수 카카오 의장도 일단 외국에 있다는 것만 알려져 있어요.

가계통신비 인하가 정국의 뇌관으로 부상한 상태에서 통신3사 최고경영자(CEO)들도 대부분 불참했습니다. 황창규 KT회장과 권영수 LG유플러스 부회장은 모두 12일 국감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권 부회장은 확정국감에는 참석한다는 뜻을 전하기는 했으나 엄연히 12일 증인석에 없었습니다.

다만 박 사장은 나타났습니다. '단말기 완전자급제를 검토하며 가계통신비 인하를 위해 시장 모두가 고민해야 한다'는 민감한 주제부터 5G 내년 상용화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거침없는 답변으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가 국감에 통신3사 CEO 중 유일하게 증인으로 출석하자 기자들이 한꺼번에 몰려 약간의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박 사장이 완전무결한 경영인은 아닐겁니다. 그러나 가계통신비 인하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만큼 최소한 통신사 주요인사가 국민앞에 나서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는 자리는 반드시 필요한 것 아닐까요? 이 대목에서 박 사장은 꽤 괜찮은 수를 둔 셈입니다.

물론 고민은 있었을 겁니다. SK텔레콤 관계자는 "11일 밤까지만 해도 국감 증인으로 참석할지 여부를 두고 내부에서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부름을 받았으니 나가야 한다는 사장의 의지가 중요했다"는 귀띔도 해줬습니다.

결국 박 사장은 국감에 증인으로 출석하며 최소한 가계통신비 논란에서 통신사들이 일정정도 문제를 풀 의지가 있고,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도 극적으로 보여준 셈입니다. 나아가 업계 고민의 주도권을 SK텔레콤으로 끌고와 비판과 지적으로 얼룩진 대중의 분노에 약간의 진정제도 놓았다는 평가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 정면돌파를 택하는 이를 경이롭게 보는 경향이 있거든요.

여담이지만 황 회장이 국감에 증인으로 참석하지 못한 이유는 조만간 보도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전망입니다. 피할 수 없는 해외 비즈니스가 있어 부득이 12일 국감에 증인으로 참석하지 못하지만, 그 비즈니스가 무엇인지 곧 알게 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여기에 대한 가치판단은 성급하게 하면 곤란하다고 봅니다. 무턱대고 박 사장과 비교해 비판하는 것은 약간 지양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KT의 해명이 사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차분히 기다려 볼 생각입니다.

[IT여담은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소소한 현실, 그리고 생각을 모으고 정리하는 자유로운 코너입니다. 기사로 쓰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한 번은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를 편안하게 풀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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