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은 광해임금 때 역모를 꾸민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한 분이다. 그분께서 <홍길동전>이라는 한글소설을 펴내신 것은 잘 아는 사람들도 그분께서 역모를 주동했다는 모함을 받아 능지처참을 당하신 사실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허균이 <홍길동전>을 펴냈다는 그 자체가 당시 세대로서는 체제에 대한 저항이자 혁명 그 자체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역모를 꾸몄다는 모함으로 능지처참을 당했다는 것이 과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

반상(班常)과 적서(嫡庶)의 구분이 엄격하여 양반이라고 하면 자신이 첩에게서 낳은 아들도 그 축에 들이지 않고 기득권을 지키던 시대에 서출의 몸인 홍길동이 그리도 신출귀몰하다는 이야기를 썼다는 것 자체가 혁명이다. 게다가 그 소설에는 ‘율도국’이라는 이상향의 나라가 등장한다. 신분에 대한 차별이 없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해 가면서 모든 백성이 서로 돕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다. 그런 사상은 당시의 조선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엄청난 새로운 사상의 도입이었다. 체재를 붕괴시키는 신세계를 꿈꾸고 있다고 몰아 붙여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우리의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주의 이야기를 쓰는 것 자체를 죄로 치부했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 자체가 빨갱이들이 하는 짓이라고 몰아 붙여 수많은 민주투사들의 목숨을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군사독재 시절을 기억한다면 충분히 납득이 갈 일이다. 엄연히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내걸었던 현대에서도 그리한데 왕이 존재하는 정권에서야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허균은 <홍길동전>을 펴낸 것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를 않았다. 오히려 유배 중에 그 책을 펴낸 후 유배도 풀리고, 광해 임금으로부터 더 중요한 여러 가지 중책들을 맞게 된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펴낸 이후에도 광해임금으로부터 중책을 맡게 된 것에 대해서는, 광해임금이 원래 백성사랑의 정신이 투철하고,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는 것과 일치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만일 허균의 삶 자체가 허균 스스로 주장하는 사상과 일치하지 않았다면 광해임금은 허균을 총애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균은 자신의 글에서만 신분을 타파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능력에 따라서 각자의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그의 실제 삶이 그랬다.

그는 당시에 고관대작의 아들이지만 서자라는 이유만으로 양반도 평민도 아닌 반쪽짜리 인생을 살아야 했던 ‘강변칠우’와 친밀하게 지냈다. ‘강변칠우’는 영의정의 서자였던 박응서, 관찰사의 서자인 심우영, 외 서양갑, 이준경, 박치인, 박치의, 김평손 등 고관의 서자 일곱 사람이 관계에 진출하지 못하는 세상을 비웃으며 북한강변에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낸 사람들이다. 허균은 그들과 어울리며 같이 시를 읊고, 능력이 있으면서도 단지 서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야 하는 그들과 함께 불합리한 세상을 비웃어 주었다. 물론 그 덕분에 허균은 훗날 계축옥사를 일으키는 소위 ‘칠서의 변’ 이라고 불리는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모함을 받았으나 명나라에 천추사로 다녀온 덕분에 화를 면하기도 했다.

계축옥사는 서자 신분으로 왕위에 오른 광해임금이 즉위한 뒤에, 적자인 영창대군을 옹립하여 역모를 꾀하였다는 이유로 소북의 류영경 등을 죽이고 소북을 몰락시킨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도화선이 된 것이 허균과 친밀하게 지내던 강변칠우의 은(銀) 상인 살해사건이다. 강변칠우가 은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강탈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대북은 그들에게 '영창대군을 옹립하여 역모를 일으키려고 했다'는 허위자백을 시켰고, 결국 그들로부터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고 인목왕후도 역모에 가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로 인해 김제남은 사사되었고, 영창대군은 폐서인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인과 남인 세력이 대부분 몰락하고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허균은 비단 서얼들뿐만 아니라 천민인 유희경과도 친분이 두터웠으며, 기생 계생과도 시로 문답을 주고받는 등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대화상대를 만나면 대화하고 시국을 걱정하며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