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이것으로 봐서 두 강에 있는 적선은 거의 다 부산으로 철수하여 돌아간 것으로 판단하고 그날 밤을 천성보에서 지내고 1592년 10월 4일, 팔월 스무아흐레, 丙辰일로서 偏官丙(화)이 偏印辰(토)을 대동한 날로서 닭이 울기 시작할 때에 배를 출발하여 두 강 앞인 동래 땅 장림포에 다다랐을 때 마침 적병 30여 명이 대선 4척과 소선 2척에 나누어 타고 양산에서 나오다가 아군의 함대를 보고 기겁을 하여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도망하였다.”

“네, 빈 배만 남은 것을 본 원균은 좋아서 뛰면서 자기가 거느린 배를 맨 먼저 몰고 달려들어 빈 배 5척을 깨뜨렸습니다. 적선을 보면 겁이 나서 뒤떨어지던 원균이 이 빈 배에 대해서는 의외로 용기가 있었습니다. 장군의 우후 이몽구가 원균의 행동을 보고 분노하여 앞서서 대선 1척을 깨뜨리고 수급 하나를 베었고, 이것으로 봐서 아직 두 강 속에 적선이 남아 있는 것을 짐작하고 함대를 둘로 나우어 양산강과 김해강으로 들어가 전멸시키려 하였으나 강이 좁고 물이 얕아서 판옥대선이 들어가 싸울 수가 없으므로 해가 지고 어두워올 무렵이 되어 가덕도 북쪽 해안으로 돌아와 밤을 지내면서 장군은 이억기와 원균을 불러 밤이 깊도록 계략을 의논한 결과 두 강에 비록 다소의 적선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걱정할 것이 안 되고, 아군을 보고 밤을 타서 반드시 도망쳤을 것이니 내일은 부산에 있는 적의 근거지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8) 1592년 10월 5일, 구월 초하루, 丁巳일의 부산포 해전

“음! 부산포 해전의 날이 기분 나쁘게 丁일이다. 장군의 사주時干의 癸(수)와 丁이 부딪치면 官食鬪戰의 날이어서 日陳을 잘못 택한 것이다. 나라가 풍전등화인데 그까짓 일진이 중요할 것은 못되리라 그렇지만 하루를 비켜서 공격했더라면 좋았을 것으로 본다.”

“네, 좀 아쉬운 장면입니다. 새벽에 닭이 울 때에 160여척의 대함대가 서로 꼬리를 이어 동쪽으로 항해하여 몰운대 앞바다에 다다르니 甲辰시가 되어 동풍이 강하게 불어 물결이 산처럼 솟아올랐으나 그대로 항해하여 동쪽의 부산포를 향하여 화준도, 구미도에 이르러 적의 대선 5척을 만나니, 녹도만호 정운이 먼저 맞아 싸우고 장수들도 힘을 합하여 적선 모두를 깨뜨리고 다대포 앞에 이르러서 적의 대선 8척을 광양 현감 어영담이 맞아 싸우고 장수들도 힘을 합하여 한 척도 남기지 않고 깨뜨리고 서평포 앞바다에서는 적의 대선 9척을 만나 방답 첨사 이순신이 맞아 싸우고 역시 장수들도 힘을 합하여 모두 다 깨뜨리고 절영도 밖에서는 적의 대선 2척이 서 있는 것을 조방장 정걸이 맞아 싸우고 역시 장수들이 합세하여 모두 깨뜨렸습니다.”

“음! 몰운대에서 절영도까지 오는 길에 적의 대선 24척과 적병 수천 명을 전멸시키는 것을 본 육지에 있던 적병들은 몹시 놀라 혼비백산하여 산을 넘어 도망해버리고 아군들은 사기가 충천하게 올라 역풍에 배젓기가 매우 힘이 들었으나 피곤한 것도 잊고 사력을 다하였다.”

“네, 장군의 함대는 절영도 앞바다에 진을 치고 남아있는 적선을 모조리 나포한 뒤에 소선을 풀어 부산진 선창의 동정을 내보냈던 탐망선을 통한 보고는 부산 선창에 적선 500여 척이나 늘어섰다고 하며 아군의 탐망선이 온 것을 보고 적의 선봉같이 보이는 대선 4척이 따라 나오더라고 하였습니다.”

“음! 적선 500여 척이란 말을 들은 원균은 크게 놀랐고, 이억기까지도 아군의 160여 척과 적군의 500여 척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다하며 주저하였으나 장군은

‘당당한 우리 군사의 위세를 가지고 만일 적의 소굴인 부산을 아니 치고 물러간다면 적은 반드시 우리 수군을 업신여길 것이니 아군은 장차 낭패가 될 것이오. 군사란 알려진 명성과 위세를 주로 하는 법이오. 병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아니하며 또 우리가 이곳에서 싸워서 전멸을 당할지언정 싸우지 않고 돌아서지는 못하리라!’

하고 장군은 손수 영기(令旗=조선시대 때 군중에서 전령을 전하는데 쓰던 기, 사방 2자 가량의 푸른 비단 바탕에 붉은 빛으로 令자를 썼음)를 들어 부산 선창을 향하여 총공격하라는 엄명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