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리차드 세일러 시카고대 교수는 경제 현상에 대한 이론적분석과 합리적인 정책 대안을 함께 내놓는 ‘컨설턴트’로 유명하다. 그는 인간을 합리적이고 최적화된 의사결정을 내리는 ‘시스템’이 아니라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고 습관적인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유기체로 조명했다. 그래서 세일러 교수는 아모스 트버스키, 다니엘 카네만 등 70년대 이후부터 행동 경제학을 연구해 온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석학으로 손꼽힌다. 그는 경제학을 어려운 수학과 통계의 향연에서 이야기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스토리텔러로도 알려져 있다.

세일러 교수는 경제위기나 저성장의 원인을 '정책 운영자나 기업인 개인'의 문제로 가볍게 치부해서는 안되며, 인간과 집단의 비합리성이 구조적으로 누적돼 만들어진 '경로의존성'의 결과로 봐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세일러 교수는 경제 분석을 둘러싼 일체의 선정적 이슈 제기를 절제하고 인간 본연에 대한 치열한 통찰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석학이다. 

▲ 9일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리차드 세일러 교수(출처=시카고대 부스 비즈니스스쿨 홈페이지)

‘카네기 학파’에 영향을 받은 세일러 교수

세일러 교수가 가장 많이 참고한 경제학적 전제는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 개념이다. 정치학자이자 경제학자, 인공지능의 초기 이론가로 알려진 고(故)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 카네기멜론대 교수가 1958년 ‘미국 경제학 리뷰’(American Economic Review)에 실어 알려진 이론이다. 사이먼 교수는 2차 대전을 비롯해 인류사에서 인간의 비합리성이 작동했던 여러 사건들을 규명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은 완전한 정보를 갖고 있고 의사결정을 하는데 충분히 합리적인 최적화 시스템을 두뇌에 내재하고 있다”는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의 가정을 깨뜨렸다.

사이먼 교수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카네기멜론 대학에 ‘산업관리대학원’(현재 테퍼 비즈니스 스쿨; Tepper Business School)을 만들고 경제학자 모딜리아니, 경영학자 제임스 마치, 사회학자 해리슨 화이트 등 기라성같은 석학들을 영입했다.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엘리노어 오스트롬과 올리버 윌리엄슨도 카네기멜론에서 사이먼의 ‘조직이론’ 강의를 들었다. 이들을 가리켜 미국 사회과학계에서는 ‘카네기 학파’(Carnegie School)라고 부른다.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벵트 홈스트롬(Bengt Holmstrom)과 올리버 하트(Oliver Hart) 등이 주장한 ‘계약 이론’(Contract theory)도 제한된 합리성 개념과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해 왔다.

카네기 학파가 이후 행동경제학을 이끌면서 제시한 이론적 개념은 두 가지다. ▲ 50년대 말 사이먼이 주장한 ‘제한된 합리성’ 개념과 ▲인간의 의사결정은 ‘최적화’가 아닌 ‘만족’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는 관점이다. 전통 경제학자들은 조직이나 개인의 투자 성과를 분석할 때 0점에서 100점까지 연속선상에서 평가했다. 그들은 객관적인 점수가 높을수록 조직과 만족도도 비례해서 증가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카네기 학파와 행동경제학자들은 “어떤 사람은 89점을 맞아도 성과가 낮다고 느낄 수 있고, 90점 이상이면 무조건 성과가 높다고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간급 간부들을 보채 가며 더 높은 업무 성과를 요구하는 임원들, 학생을 독려하는 교사들의 행동도 ‘만족’의 프레임으로 설명 가능하다. 이 개념들은 모두 세일러 교수가 자신의 논문에서 자주 인용하는 전제들이다.

▲ 리처드 세일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카네기 학파'의 시조 허버트 사이먼 교수(출처=카네기멜론대 홈페이지)

‘행동 금융’ 선구자로 도약하다

세일러 교수는 카네기 학파들의 제한된 합리성 개념과 만족 개념을 70년대 이후부터 유행하던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 연구들과 결합해 금융 연구로 쏟아냈다. 세일러 교수가 처음 유명세를 얻게 된 계기는 1985년 발표한 ‘금융 저널’(Journal of Finance)에 발표한 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주식시장이 예상치 않은 이벤트나 드라마틱한 뉴스에 과도한 반응(Overraction)을 보인다는 사실을 규명하고, 인간은 명확한 확률과 통계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치, 주관적 인상 같은 것들에 기반해 경제적 의사결정을 내린다고 일갈했다.

이 연구로 세일러 교수는 인간의 주관적 의사결정을 주장했던 하이에크(Hayek)나 미제스(Mises) 등 오스트리아 학파들과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시장 불개입주의자, 다니엘 카네만(Daniel Kahnemann)을 필두로 한 행동경제학 이론가들의 연구를 통합할 수 있었다. 세일러 교수는 실제로 자신의 행동 금융 이론을 반영한 사모펀드의 고문으로도 재직 중이다. 그는 “자신이 지분을 갖고 있는 기업의 주식은 사지 말라. 포트폴리오에 대한 과도한 신념이 수익률을 망친다”고도 주장했다.

또 세일러 교수는 대부분의 국가가 내놓는 규제와 기업의 정책이 불완전하다고 본다. 유명한 저작 ‘넛지’(Nudge)도 이 관점에 기초해 씌어졌다. 세일러 교수는 규제는 완전한 공정성(Fairness)이 아니라 특정 집단과 주체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업 정책도 고객들로부터 불공정성의 원흉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출 압박에 시달리는 제조업체가 급하게 할인 정책을 펼 경우, 이전에 정가로 구매한 고객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평판 하락을 초래할 수 있다. 그래서 세일러 교수는 기업이나 정부들이 갑작스럽게 시장에 개입하기보다는 대중들의 심리 조절 단계를 통해 ‘부드러운 개입’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외쳐 왔다.

▲ 리처드 세일러와 행동경제학자들이 주장한 '체감 회계' 개념(출처=Sketchplanations)

행동경제학의 이론들을 교류시키는 데 애써

세일러 교수는 여러 행동경제학의 이론들을 교류시키는 데도 애썼다. 사람마다 비용 지출 항목에 대한 주관적 허용치가 다르다는 ‘체감 회계’(mental accounting) 개념이나 손실 회피(Loss aversion) 개념은 세일러 교수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행동경제학자들이 계속해서 실험과 분석 모델을 만들면서 발전시켜온 집단적 창조물이다. 1974년 다니엘 카네만과 아모스 트버스키는 불확실성과 손실에 대한 개념을 재정의하기 위해 ‘전망 이론’(prospect theory)을 제시했다. 세일러 교수는 이 이론을 좀 더 발전시켜 손실이 주는 심리적 충격이 이익이 주는 감동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가령 어떤 소비자가 100%의 확률로 30달러를 받는 상황과 80%의 확률로 50달러를 받는 상황에 직면한다면, 좀 더 가능성이 높은 전자의 대안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비자가 100%의 확률로 30달러를 잃는 상황과 80%의 확률로 50달러를 잃는 상황에 직면하면 오히려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세일러 교수는 인간이 이렇게 이익 시나리오에서는 보수적이고, 손실 시나리오에서는 모험적인 이유는 손실에 대해 더 민감한 인간 속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소유 효과(endowment effect)도 마찬가지다. 미술품이나 골동품과 같이 일반적으로 거래되지 않는 재화들은 상식 수준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매물로 나오곤 한다. 소유자가 자신의 상품을 판매하면서 느끼는 고통이 구매하면서 느끼는 기쁨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유자는 자신이 상품을 보유해 왔던 기간에 비례해 정상 수준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매물을 내놓게 된다.

▲ 리처드 세일러와 대화하는 행동경제학자 다니엘 카네만(출처=Edge.org)

현실 참여적 경제학자

오바마 전(前)미국 대통령의 경제자문관을 지내기도 했던 세일러 교수는 사회보장제도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꾸준히 강조해 왔다. 그는 미국의 복지제도가 사적 연금 위주로 이뤄져 있어 오히려 사회 전체적으로는 손실이 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개개인이 가입 선택권을 갖되 자동으로 월급 계좌에서 연금 비용이 정산되는 체계로 개편되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뉴욕타임즈 칼럼을 통해 언급해 왔다. 세일러 교수의 현실참여적 면모는 캐스 서스타인과의 공저 ‘넛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어려운 수식과 통계로 이뤄진 경제학 연구를 좀 더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사례와 일화 위주로 설명하는 데 익숙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세일러 교수의 평판은 “느리지만 꾸준한 연구를 통해 도약한 학자”라는 지적이다. 법경제학 연구자인 고학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 손에 꼽을 만한 세계적 명문대 출신은 아니지만(그는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과 로체스터대학을 졸업했다) 꾸준히 국제 학계에서 주목받는 성과를 냈고, 행동경제학을 주류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사람이 리처드 세일러 교수”라고 평가했다.

경제정책 운영자들은 '인간 불완전성' 고려하고 정책 디자인해야

세일러 교수와 캐스 선스타인 박사는 2003년부터 스스로를 '자유주의적 온정주의자'(Liberarian Paternaist)라고 호칭해 왔다. 자유주의자로 무조건 시장을 가만 내버려두거나 시장개입주의자로서 강제하지 않고, 경제 주체들이 옳은 선택을 하도록 틀만 설계하는 조정자라는 뜻이다.

세일러 교수가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는 '잘못된 행동'(misbehaving)이다. 경제 주체는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오류를 저지르며, 가장 합리적인 선택보다는 과거에 해 왔던 익숙한 선택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행동경제학을 비롯해 제도 이론을 연구해 온 대안 경제학자들이 줄곧 이야기해 온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e)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세일러를 비롯한 경제전문가들은 하나의 '선택 설계자'(choice architect)로서 경제 주체들이 경로의존성의 길만 밟지 않고 옳은 방향으로 가도록 조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 

또 세일러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정책 의사결정자 개인이나 특정 기업인이 잘못을 저질러 경제적 어려움이 초래됐다는 설명은 맞지 않다. 오히려 여러 집단의 실패와 비합리적 선택이 누적되어 '경로의존적'으로 진화되어 온 오류가 저성장이나 경제 위기 등의 근본 원인에 가깝다. 따라서 경제 정책 운영자들은 인간과 집단의 불완전성을 고려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의사결정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세일러 교수의 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