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ffectionate Things, 32×32㎝ Hanji on Canvas, 2017

 

박동윤(朴東潤) 작가가 무려 근 20년간 동일한 제목의 작품을 해왔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까? 예술적 진정성의 표지일 수도 있고 강박과 덧없는 재생산의 징후일 수도 있다. 예술적 문제의식의 동일성은 유지하면서 그 실질은 한 번도 제자리에 머문 적이 없는 그는 그가 원하는 답을 얻기까지 끊임없이 실험해 왔고 변화를 멈추지 않았다.

20년간 이어져온 예술적 고투는 이제 그 분명한 답을 찾은 것 같다. 예술가의 일이란 결국 이 세계에 자기가 가진 느낌과 느낌의 방식을 내보이는 것이며 이를 자신의 언어와 양식을 통해 확립하는 것이다. 그의 언어가 분명하다면 그 안에서 느낌의 소통과 공유가 거의 필연적 수순으로 일어난다.

대체로 그의 언어와 느낌이 선명하면 할수록 그렇게 해서 그 언어가 주는 느낌이 충분히 강렬할수록 그의 예술은 성공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의 문제의식, 정확이 예술적 문제의식이 무엇이길래 달리말해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원하고 찾던 것이 무엇이길래 한 제목을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쓸 수 있었을까?

 

▲ Affectionate Things-Side View, 130×89㎝ Hanji on Canvas, 2017

 

서양화가 박동윤(ARTIST PARK DONG YOON)에게서 풀리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결론을 미리 말하면 그는 2007년 이후 한지 추상화 작품에서 해답을 어렴풋이 감지했고 이 막연한 느낌을 붙잡고자 몇 년을 더 여러 실험을 거쳤다. 2013~14년 즈음 취할 것과 버릴 것, 부각할 것이 선명해졌고 최근 작업에서 그가 찾고 실험한 요소들은 하나의 통일된 예술언어로 변모했고 완성됐다.

그러나 이런 기술이 ‘애정’연작 각각의 독립성을 부정하거나 마치 그 이전의 작업이 불완전하거나 미완이라는 의미로 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선 다만 전체 연작에서 하나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부각해 보자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두 개의 ‘꽃’연작, ‘Affectionate Things-Flower, 2014’와 ‘Affectionate Things-Flower, 2015’에서 다시 한 번 전환을 맞게 된다. 여기서 날들은 이제 자신의 존재, 살아 있음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전까지 날들은 회화의 추상적 구성을 위해 봉사하는 사물들이었고 이래선 그 자체로 살아 있다고 말 할 수 없다. 그것들은 날로서의 사물 이었지만 여전히 도구였고 그 기저는 물질(matter)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다른 사물이나 존재와 외적관계만을 맺는 존재에게는 붙일 수 없는 술어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다른 존재와 내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존재이다. 2014년부터 날들은 이제 점차 자신들이 살아있는 존재임을 분명히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사물로서의 날으 연장과 공간의 분할이라는 근대적 기능을 완전히 벗어났다. 어느 순간 박동윤 작가는 날들이 그 스스로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 힘들은 다른 날들의 힘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다.

두꺼운 한지를 여러 겹 붙여 날의 뼈대와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색 한지를 또 여러 겹 붙여 날의 살을 만든다. 여기까지는 인위이다. 날의 운명은 이제 작가의 손에 달려있다. 작가는 이 인위를 즉 회화적 구성이라는 인위를 덧 씌어 인위를 배가할 수 있고 반대로 여기서 인위를 멈출 수 있다.

△글=조경진(철학박사,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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