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의 전문가 칼럼에 ‘엄창섭의 해부학적 삶’이란 제목으로 글을 기고하기로 했다. 말을 꺼내 놓았으니 꼭지를 따야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어 왔다. 우선은 학기가 시작되어 바쁘다는 핑계를 대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에 대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사로서 해부학이라는 남들이 쉽게 선택하지 않는 학문을 전공으로 선택하여 살아온 여정을 나누자는 것은 아닐 터이고, 해부학자로서의 전문성에 근거하여 나름 이 사회의 문화든 경제든 정치든 교육이든 아니면 그저 사람 사는 처세에 관한 것이든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제시하라는 것일 터이다. 과연 내가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우선 경륜도 부족할 뿐 아니라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지라 내 생각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글로 녹여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 두려움을 안고 이제부터 만들어 가고자 하는 칼럼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름은 ‘해부학적 삶’이라 하였다. ‘해부학’과 ‘삶’을 가지고 ‘기둥(칼럼)’을 만들고자 한다는 의도이다. 기둥은 제일 아랫부분인 바닥(base), 기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몸통(줄기, shaft), 제일 위의 머리(capital)라고 하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축 양식에 따라 기둥의 각 부위의 모양이나 구성이 독특한 특성과 모양을 하고 있다. 내가 가장 잘 아는 ‘해부학’에서 얻은 지견을 바닥으로 하고, 그 위에 ‘삶’을 세워 줄기를 만들면 흉하지 않은 기둥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줄기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결과물들이 기둥 머리의 한 부분이 되고, 그런 부분들이 모여 천정을 얹어도 될 정도로 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하는 인사를 드린다.

‘기둥’의 바닥이 될 해부학이라는 것에 대하여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해부학이라는 말은 들어보기는 했어도 대부분은 무엇인지 잘 모를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부학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의 몸을 눈으로 보고 살피는 학문분야이다. 해부학은 크게 3개의 세부분야로 나눈다.

‘맨눈해부학’ 혹은 그냥 ‘해부학’은 특별한 확대 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의 몸을 관찰하는 분야이다. 겉은 그냥 보면 되지만 몸속은 칼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갈라 풀고(解), 쪼개야(剖) 자세히 살펴 볼 수 있다. 그래서 해부인 것이다.

해부학의 두 번째 분야로 ‘조직학’이라는 것이 있다. 몸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를 살피는 분야이다. 현미경이라는 기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현미경적해부학’이라고도 한다. 현미경하면 떠오르는 광학현미경은 빛을 이용하여 0.1mm보다 멀리 떨어진 두 점을 구분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이 외에도 다양한 현미경이 개발되어 있는데, 빛 대신 전자를 사용하는 전자현미경이 대표적인 것이다. 전자현미경으로는 최대 0.1nm까지 구분할 수 있다. 최근 개발된 원자현미경은 척력, 마찰력 등 다양한 화학적 물리적 특성을 이미지로 변환시켜 보여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해부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도 사람의 몸 전체 뿐 아니라 몸을 구성하는 세포, 분자 수준에까지 확장되었다.

해부학의 세 번째 분야는 ‘태생학’이라는 분야인데,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지고 온전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을 살핀다.

그래서 해부학은 생명의 시작인 수정, 아니 그 이전으로부터 생명의 마지막인 죽음, 그리고 그 이후까지를 아우르고 있고, 맨눈으로부터 원자 수준에 이르는 다양한 깊이에서 사람의 몸을 살펴보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기둥의 몸통이 될 ‘삶’에 대해서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약간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여러분의 시각과 나의 시각을 일치시키기 위해서이다. ‘삶’은 동사인 ‘살다’의 어간에 명사형 어미인 ‘ㅁ’을 붙여 만들어진 명사이다. 그래서 삶이라는 단어 속에는 단순히 ‘살아있음’이라는 의미보다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적인 상태의 순간순간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정신없이 이어져가는 ‘살아감’ 속에서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는 기회, 그것이 삶의 가치이고 즐거움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삶’이다.

앞으로 만들어가고자 하는 기둥은 해부학을 바닥으로 살아가는 순간순간 경험하는 생명의 머무름을 잘 엮어서 기둥의 줄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