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서스펜디드 커피(Suspended Coffee)는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마시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한 나눔 운동이다. 네트워크에 가입된 가게에서 미리 커피값을 내놓으면, 커피값이 없지만 커피를 마시고 싶은 이가 공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100년 전 나폴리에서 카페 소스페소(Cafe Sospeso)라는 이름으로 부랑자에게 커피를 나눠주면서 처음 시작되었다 하니, 커피의 본고장에 어울리는 역사 깊은 나눔 방법이다.

미리내 운동은 서스펜디드 커피의 나눔 방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우리나라의 나눔 실천 운동이다. 달라진 것은 단순히 커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빵, 분식 등의 음식점부터 쌀 농원, 안경점, 휴대폰 판매점까지, 어떤 가게든 이웃과 나누기를 원한다면 어디나 미리내 가게가 될 수 있고, 미리내 가게에서는 누구나 도움을 주거나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미리내 운동을 시작한 ‘미리내맨’ 김준호 교수(동서울대 전기제어학과 교수)는 미리내 운동 이전에 애플리케이션(앱)과 퍼블리싱 전공을 살려 기부 앱을 개발했다가 실패를 경험했다. 그 후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기부 플랫폼을 만들기 위해 기부문화에 대해 공부하면서 서스펜디드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서스펜디드 커피의 캠페인 방식을 쿠폰과 결합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돈을 미리 낸다는 점에 착안해 이름도 ‘미리내’로 지었다. 수많은 별이 모여 강을 이루는 은하수의 우리말이기도 한 미리내는 많은 사람들의 작은 나눔이 모여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캠페인에 딱 맞는 이름이다.

미리내 운동의 특별한 점은 조직도 없고 틀도 정해져 있지 않은 오픈 플랫폼이라는 것이다. 나눠야 하는 물품도, 나눔의 방식도 정해져 있지 않다. 무엇을 어떻게 나누면 좋을지 점주들이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고 SNS를 통해 활발하게 공유하며 확산시킨다. 미리내 운동본부가 있었을 때도 캠페인에 참여한 가게들의 운영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2015년에는 조직마저 해체했다. 미리내 운동은 시스템이 정해진 사업모델이 아니라 미리내 가게와 참여자들이 주체적으로 ‘판’을 벌일 수 있는 일종의 커뮤니티이기 때문이다. ‘사장님’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나눔도 진화한다. 안경점은 포인트를 모아 어르신들에게 돋보기를 제공하고, 휴대폰 대리점에서는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중고폰을 제공하거나 요금을 대신 내준다. 헌혈증을 가져오면 선물을 주기도 한다. 손님으로 미리내 운동의 나눔에 참여할 때도 그냥 돈만 내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싶은 대상을 정할 수 있다. 환경미화원, 생일인 사람 등 누구에게 나누고 싶은지 쿠폰에 적어 상자에 넣으면 된다. 감사의 말을 적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손님을 위한 미리내 엽서도 있다.

미리내 가게가 되기 위해 별도의 연회비나 후원금은 필요하지 않지만 신청서를 작성해서 보낸 후 미리내 동판, 쿠폰, 상자, 엽서, 알림판 등이 포함된 물품세트를 구매해야 한다. 이는 미리내 가게임을 알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이다. 1호점이 2013년 5월 경남 산청에서 문을 연 이래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 연결되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한 미리내 가게는 1년 8개월 만에 300개를 돌파했고, 현재 전국적으로 500개를 넘어섰다.

http://www.mirinae.so/
http://da.mirinae.so/

 

INSIGHT 

“좋은 예술가는 적당히 모방하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통째로 훔친다.” 미술의 거장 피카소의 명언이다. 미리내 운동은 이탈리아의 카페 소스페소를 적당히 모방해 단순히 커피 나눔만을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낯선 이에게 선의를 베풀 수 있는 시스템을 통째로 가져왔다. 그 덕에 한국의 미리내 운동은 빵부터 휴대폰까지, 더 다양한 사업체들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겉모습은 모방할 수 있어도 속까지 모방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전체를 관통하는 본질은 모방으로 되지 않는다. 좋은 시스템이 있다면 모방하지 말고 훔치자. 그래서 내 것으로 만들자. 그러다 보면 원래 내 안에 있던 것과 어우러져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 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