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도통신이  20일 도시바 이사회가 한미일 연합에 메모리 사업부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사상 초유의 회계분식과 원전손실로 휘청이는 도시바의 메모리 사업부가 SK하이닉스, 베인캐피털 등이 포함된 한미일 연합의 품에 안기게 됐음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막판까지 웨스턴디지털(WD)의 반격에 인수전이 혼전양상을 보였지만 결국 도시바의 선택은 한미일 연합이 됐다.

지난해 원전사업 자회사 웨스팅하우스가 파산하며 도시바는 뿌리부터 흔들렸다. 당장 기업의 존폐를 걱정할 정도로 코너에 몰렸다는 후문이다. 이에 도시바는 지난 1월 메모리 사업부 사업을 분사해 19.9%의 지분을 매각하고 2월부터 지분 매각 예비입찰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손실이 예상보다 크다는 지적에 따라 도시바는 지난 3월 메모리 사업부 지분 50%를 매각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19.9%의 지분 매각으로는 글로벌 기업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는 점도 주효했다. 대만의 폭스콘과 SK하이닉스, 베인캐피털 등이 포함된 한미일 연합은 즉시 출사표를 던졌다.

5월 2차 입찰이 종료되며 도시바 메모리 사업부 인수는 5파전으로 정리가 됐다. 미국의 브로드컴과 사모펀드 운용회사 KKR, 베인캐피털과 연합한 SK하이닉스와 폭스콘을 비롯해 타사 매각을 반대하는 WD가 그 주인공이다.

당시 판세는 KKR이 제일 유리했다. 일본 정부가 도시바 매각을 국부유출로 규정하고 가능하면 자국에서, 그것이 아니라면 동맹국인 미국 기업이 인수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미국 사모펀드인 KKR이 매력적인 후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일본 산업혁신기구와 협력해 미일 연합을 꾸리며 도시바 메모리 사업부 인수에 바짝 다가섰다.

브로드컴도 미국 기업이라는 점에 후한 점수를 받고 있었다. 대만의 폭스콘은 샤프 인수의 경험을 살려 도시바 메모리 사업부를 품어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 생각이었고 이미 도시바와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연합하고 있는 WD는 기술유출을 우려하며 인수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SK하이닉스와 베인캐피털은 일종의 다크호스로 분류됐다.

반전은 6월 초에 벌어졌다. 도시바 인수전의 다크호스로 분류된 베인캐피털과 SK하이닉스가 KKR 대신 일본 산학혁신기구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최태원 SK회장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파장으로 묶여있던 출국금지 조치가 해제되자 바로 일본으로 날아가 도시바 임원들을 만났고, 현장에서 도시바 현 경영진이 인수에 참여하는 MBO(Management Buy Out) 방식을 제안했다.

승기는 순식간에 SK하이닉스와 베인캐피털, KKR과 일본 자본이 의기투합한 한미일 연합으로 흘러갔다.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낸드플래시 시장 강화를 바탕으로 전체 메모리 반도체 시장 공략에 나서려던 본래의 계획이 탄력을 받게 됐다.

실제로 SK하이닉스는 이미 올해 8월부터 2019년 6월까지 총 2조2000억원을 투자해 청주에서 반도체 공장 건물과 클린룸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청주와 이천, 중국 우시에 사업장을 갖고 있다. 2005년 가동에 들어간 이천의 M10은 D램, M14의 아래층도 D램, 윗층은 3D 낸드플래시를 맡고 있다. 그룹 차원으로는 반도체 수직계열화 전략도 추진되고 있다. 지난해 반도체용 특수가스 제조업체인 SK머티리얼즈를 인수하며 반도체 소재 사업에 진출했으며, 반도체 칩의 핵심 기초소재인 반도체용 웨이퍼를 국내에서 유일하게 제조판매하는 전문기업인 LG실트론까지 품에 안았다.

업계에서는 한미일 연합의 낙승을 점쳤다. 폭스콘은 대만 기업이라는 점에서, WD는 대안도 없이 무턱대고 인수전 자체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도시바 메모리 사업부는 한미일 연합의 손에 들어오는 듯 했다.

구체적인 컨소시엄 지분도 공개됐다. 우선 주축인 일본 민관펀드인 산업혁신기구가 1조1500억엔 규모로 추정되는 보통주의 50.1%를 출자, 도시바 메모리를 자회사로 만든다. 이후 SK하이닉스와 미국의 베인캐피털은 산업혁신기구 지분을 제외한 49.9% 가운데 총 33.4%의 보통주 지분을 가져가며 당연히 주요 의안에 대한 거부권을 갖게 되는 방식이었다. 나머지 지분(49.9%-33.4%) 16.5%는 일본 국책은행인 정책투자은행이 가져가는 쪽으로 정리됐다. 구체적인 인수 계약이 6월27일 있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새로운 반전은 7월 초, 한미일 연합과 도시바의 협상이 다소 늘어지며 모두가 불안해하던 차에 벌어졌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익명의 소식통을 통해 한미일 연합 내부의 이면합의가 존재한다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베인캐피털의 지분 일부 또는 전부를 가져가는 모종의 이면계약을 통해 실질적인 지분 확보이 가능성을 열어뒀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도시바의 기술이 유출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한 뚜렷한 해명은 없었다.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은 7월6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도시바 메모리 반도체 인수에 참여했다”면서  “도시바와 상호 보완적인 관계 구축을 원하고 있다”고 강조한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SK하이닉스가 한마일 연합에 융자 형태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분을 의미있는 수준까지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을 숨기지 않은 상태에서, 일종의 도시바와 한미일 연합의 상생을 주문한 셈이다.

 도시바 매각이 기술과 국부의 유출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일본 정부 입장에서 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여기부터 WD의 존재감이 더욱 강해진다. WD는 도시바 인수전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이를 국제사법재판소까지 끌고 가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급전이 필요한 도시바는 합작공장의 WD 엔지니어를 추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결국 반전이 벌어졌다. KKR이 WD와 협력해 새로운 미일 연합을 결성했고, 이들이 도시바 인수전 우선협상권을 따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와 베인캐피털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뒷통수를 맞은 격이다.

그러나 반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SK하이닉스와 베인캐피털이 KKR 대신 애플을 섭외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결국 한미일 연합은 SK하이닉스와 베인캐피털을 비롯해 시게이트, 델 등 미국 IT 회사까지 아우르는 위용을 갖춘 셈이다. 나아가 2조엔에 이르는 인수비용과 별도로 4000억엔의 연구개발비를 따로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했으며, 애플은 한미일 연합이 도시바를 인수하지 않으면 앞으로 낸드플래시를 도시바에서 공급받지 않겠다는 뜻도 밝혔다.

WD는 KKR과 연합해 도시바 의결권을 포기하는 대신 자회사 샌디스크와 도시바의 조인트 회사 지분을 확보하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결국 무위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