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임진왜란 사에 원균이와 조정대신과 선조는 씻을 수 없는 민족역사에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당시에 경상도 바다에서 싸우는 이상에 그 관할권을 잡은 원균을 참여시키지 아니할 수도 없고, 다 같은 수군절도사로서 논죄할 처지도 아니었고, 또 조정에 원균의 당파가 많아서 소위 범의 꼬리를 밟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음!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역사 속에 의인과 악인, 원수와 은인이 포함되어 있어 원수 놈들에게 당한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의 민족 말살정책을 보면서 원수가 누구인지, 은인이 누구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 보니, 친일파가 그 많은 죄를 민족에게 지으면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일조하여 선거 때 표를 던지는 것을 보면 사람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표를 던지는 것을 볼 때 과연 여기가 일본인지, 한국인지를 모르겠다.”

“네, 맞습니다. 은혜와 원수를 구분하지 못한 민족의 미래가 있겠습니까? 원균은 싸울 때마다 뒤에 떨어져서 싸움 구경만 하다가 썰물에 떠내려 오는 적병의 시체와 아군의 시체까지라도 잡아 실어 목을 베는 것을 일을 삼을 줄 아는 비겁한 장수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시의 상황이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을 보면 원균이 庚子생, 선조가 壬子생으로서 장군의 用神 午(화)를 폭격하는 오행의 절대적 천적이었기에 너무 안타깝습니다.”

“맞는 말이다. 열을 받아도 참고 진행을 해야겠다. 이날은 지난 6월의 첫 승전한 전쟁터인 당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26일은 비바람이 크게 일어 배질을 못하고 있다가 날이 저물어 웅천, 제포 뒤 완포라는 곳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한시를 보자.”

 

구묘불수승여서九廟不守乘興西 삼한백일등풍우三韓白日騰風雨

일생고절一生苦節 흉장병갑胸藏兵甲 만리장성萬里長城 복유시서腹有詩書

종묘를 지키지 못하여 어가는 서쪽으로 가고

삼한은 대낮에 비바람 드높았네

평생 굳은 절개를 지키며 흉중에 병법을 간직했고

만리의 장성은 되어서 배안에 시서를 품었도다.

 

“네, 壬辰년 8월 28일에 장군이 파견하였던 정탐꾼이 육지 각처에 있는 적의 정황을 염탐하고 돌아와 아뢰기를

‘고성, 진해, 창원, 각 읍과 진주 병영 등지에 주둔했던 적병이 전라좌수사 사또의 함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이달 24, 25일 경에 모두 도망하여 부산등지로 가버렸다’

고 하였습니다.

“음! 장군은 이날 아침에 배를 띄워 양산과 김해 두 강의 어구로 갔는데, 아군의 함대가 오는 것을 본 백성들이 그리던 부모를 만난 듯이 기뻐하며 배를 타고 마중하였다. 그들은 제각기 적병에게 시달리던 이야기를 고하고, 그 중에 창원 땅 구곡포에서 포작(鮑作=바닷물 속에 들어가 조개, 미역 따위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국가의 각급 제사에 쓰는 魚鮑를 떠서 소금에 말려 진상하는 身役을 담당한 사람)하는 정말석이라는 사람은 김해강에서 3일 동안이나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도망하여 나왔노라 하며 이런 말을 고한다.

‘김해와 양산 두 강에 있던 적선 100여 척이나 되더니 2, 3일 동안에 아군의 함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떼를 지어 몰운대 밖으로 허겁지겁 도주하여 나가는 어지러운 틈을 이용하여 밤을 통해 도망해 왔소.’

라고 고하였다.”

“네, 이에 장군은 전 함대를 가덕도 북쪽 해안의 서쪽에 숨기고 방답 첨사 이순신과 광양 현감 어영담으로 하여금 가덕도 밖으로 나가 숨어서 양산강 안에 정박한 적선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더니 甲申시가 끝나갈 때나 되어서 장군에게 보고하기를 종일토록 탐망하였으나 김해강과 양산강에서 적의 소선 4척이 나와서 몰운대로 간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