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초반에 기업은 정부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정부가 일언반구도 없이 25% 약정할인을 추진하며 압박했고, 통신사는 이를 받아들이면 배임이 되지만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세요. 타격은 통신사가 보는데 환호는 정부의 몫이에요"

 

선택약정 25% 할인이 적용된 15일 이전에 업계 관계자가 한 말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법이 통과될 당시 20% 선택약정에는 통신사들이 왜 찬성했는지, 이후 높은 영업이익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가슴 속 한켠에는 불편한 감정도 스멀거렸습니다. 100% 동의할 수 없지만 일정부분 비슷한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에요.

1993년 8월12일 문민정부 집권 초기, 김영삼 대통령은 모든 금융거래를 금융거래 당사자 실제 본인의 이름으로 하도록 만드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합니다. 전두환 대통령 당시에도 금융실명제 이야기가 있었으나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태에서, 김 전 대통령은 긴급명령의 형태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훌륭한 정책이었습니다. 금융실명제가 도입되면 당장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말한  사람들의 호들갑과는 달리 시장은 빠르게 적응했기 때문이에요. 하나회 척결과 함께 김 전  대통령의 중요한 업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1982년 이철희 장영자 어음사기 당시에도 논의됐으나 좌초했고 노태우 정부에서도 유보된  금융실명제가 김영삼 정부에서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정권의 특성이 달라진 것도 원인이지만 가장 큰 동력은 역시 '집권 초기'에 있었습니다. 국민의 지지를 받아 합법으로 탄생한 정부는 집권 초기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2017년의 가계통신비 인하 이슈도 비슷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시민들의 손에 탄생한 합법 정부며, 당연히 정권 초반 그 위력은 상당합니다. 그리고 가계통신비 인하 정책을 강하게 추진하고 있어요.

그런데 소통의 부재가 아쉽습니다. 가계통신비 인하를 위해 추진하던 기본금 폐지가 좌초된 것은 씁쓸한 타격이지만, 이후 들고 나타난 25% 선택약정 인상은 말 그대로 일방통행의 전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계통신비 인하가 중요해도 사업자와의 교감은 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부랴부랴 유영민 과학기술정통부 장관이 통신3사 최고경영자(CEO)와 만남을 추진해도 협상 테이블에 올라올 의제 자체가 없었습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는데 무엇을 협상합니까?

그 과정에서 취재를 하던 중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25% 선택약정 할인을 두고 통신사들이 법적인 소송을 걸겠다고 나서던 순간, 모든 언론은 당장이라도 소송이 벌어질 것처럼 말했으나 제가 파악한 것은 약간 달랐습니다. 모두 몸을 사리고 있었어요. KT와 LG유플러스는 SK텔레콤이 나서주기를 바랬고, SK텔레콤은 그러기에 약간 부담스럽고. 언론은 내일이라도 소송장이 날아갈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으나 아니었습니다. 분명한 온도 차이가 있었어요.

그 이유에 대한 답은 위에서 소개한 업계 관계자의 멘트에 있습니다. 어차피 집권 초기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왠만하면 추진됩니다. 그런데 통신사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 들이면 배임이 되어 버려요. 반발을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정부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충분히 설득하고 이야기하며 탈출구를 열어줘야 합니다. 명분을 줬어야죠. 그리고 통신사들과 최소한의 협상을 통해 합의점을 찾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5% 선택약정 할인 정국에서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기본료 폐지도 물 건너 가자 압박 일변도로 나갔고, 통신사들은 어차피 했어야 할 일, 최소한 반발이라도 했어야 할 일을 어정쩡하게 하고는 '수순대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정부는 활빈당이 되었고 통신사들은 활빈당에 목이 잡힌 악당이 되었습니다.

이러면 곤란합니다. 초반에야 통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앞으로도 통신을 넘어 다양한 사업군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정상적인 정책 입안과 추진, 그리고 협조가 가능할까요? 금융실명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하자금을 '적폐'로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통신사가 '적폐'인가요? 통신업은 중요하지만 통신사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유연한 정책 결정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패착입니다.

어차피 추진되고, 국민에게 필요한 정책이면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최소한의 탈출구도 마련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압박 일변도로만 나가면 초반에야 환호성을 받겠죠. 나중에는 모든 것이 헝크러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련되게, 그러면서 힘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통신사에도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충분히 '할 수 있었던 가계통신비 인하'에 대한 스스로의 가이드라인을 낮추고, 합리적으로 접점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가계통신비가 지나치게 비싸다는 말. 억울 할 수 있겠지만 받아들일 여지도 있습니다.

[IT여담은 취재과정에서 알게된 소소한 현실, 그리고 생각을 모으고 정리하는 자유로운 코너입니다. 기사로 쓰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한번은 곰곰히 생각해 볼 문제를 편안하게 풀어갑니다]
 

- IT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으세요? [아이티 깡패 페이스북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