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보다 발달한 금융시장을 두고 있는 만큼 미국과 일본은 일찌감치 기업회생시장에서도 DIP 금융을 발달시켰다.

미국의 DIP 파이낸싱 시장, 자본시장 발달에 제도적 뒷받침까지

▲ 출처=이미지투데이

선진적 도산제도를 운용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DIP 파이낸싱 기법이 매우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전에는 수익률이 7%에서 9%에 이르렀고, 금융위기 이후에는 15%에서 20%까지 치솟기도 했다. 제도적 안정장치가 분명해, 기업이 자본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수록 투자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미국의 DIP 금융은 ‘한도를 부여하는 방식(Revolving Credit Line)’과 ‘현금을 지급하는 방식(Term Loan)’을 혼합한다. 금융위기 이전에는 씨티은행, GE캐피탈, 씨버러스(Cerverus) 등 시중은행을 비롯해 여신전문기관과 헤지펀드 등 다양한 투자기관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에는 헤지펀드 등으로 투자자 활동이 축소됐다.

미국의 DIP 파이낸싱 수요는 지난 2007년 130억달러, 2008년 180억달러, 2009년 620억달러(정부지원액을 차감하면 225억달러)를 기록, 정점을 찍었다. 이 시기는 GM, 라이온델(Lyondell), 크라이슬러와 같이 대기업들이 회생절차를 밟던 때다. 이후 DIP 파이낸싱은 규모가 줄어들었다. 2010년에 약 155억달러 규모였던 DIP 금융은 2014년에는 약 14억달러로 떨어졌다. 파산절차를 밟는 대기업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

미국의 DIP 파이낸싱이 활발한 데 대해 구조조정 전문가들은 “부실채권에 대한 자본시장이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유암코의 김두일 구조조정 본부장은 “미국은 부실채권 수요 시장이 잘 형성되어 있다”며 “기존 채권자가 채무 감경에 동의하고 DIP 파이낸싱이 결정되면, 채무자 기업이 회생절차에 들어가기 전에 이를 공개해버린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 사모펀드들은 지역별, 나라별, 기업별 투자에 대한 포트폴리오뿐만 아니라 부실자산에 대한 포트폴리오가 따로 있을 정도”라고 강조했다.

김 본부장은 “투자자 입장에서는 채무자 기업의 채무가 충분한 수준으로 감면되어야 투자유인이 생긴다”면서 “이런 점에서 회생계획안 인가를 위해 채권자 동의를 받는 데만 신경을 쓰는 대신, 채무감면이 충분히 이뤄져 있지 않는 우리나라 DIP 금융환경과는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DIP 파이낸싱을 위한 자본시장이 활성화되고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한 수준까지 이뤄져야 회생기업에 투자가 활발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미국 버지니아주 메릴랜드 DC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원근 변호사는 “미국의 법제도는 회생절차 중에 기업이 담보여력이 부족할 때, 담보를 설정하며 신규자금을 지원하는 경우 DIP 파이낸싱 제공자가 선순위 담보권자보다 ‘우선적으로 회수할 수 있는 지위(Super Priority)’를 부여하고 있다”면서 “이 우선권은 기업이 회생절차 중에 파산절차로 들어가더라도 보호하고 있는 권리”라고 설명했다.

반면 우리나라 채무자 회생법(통합도산법)은 회생절차 중에 담보여력이 부족한 자산에 담보를 설정해 신규 자금을 지원하더라도 DIP 금융 제공자에게 회생담보 채권자보다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때문에 DIP 금융제공자 입장에서는 투자의 동기가 충분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미국 변호사인 김 변호사는 “일반적으로 이런 우선권은 다른 담보채권자들의 동의가 필수적”이라며 “미국에서는 이 같은 동의에 대해 채권자들이 호의적인데, 이는 회생절차 기업에 대해 신규자금이 유입되지 않으면 회사 존속이 어렵다는 것을 채권자가 공통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관민펀드

일본 ‘관민(官民)펀드’는 정부의 자금과 민간의 투자금이 합쳐진 기금을 말한다. 최근 일본 도시바의 반도체 메모리 인수와 관련해 일본 산업혁신기구와 일본정책투자은행, 미국 투자펀드 KKR이 관민펀드를 조성했다고 알려지면서 알려진 용어다.

출처=일본재무성

도시바가 시장논리에 따라 매각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해외 매각에 따른 기술유출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강하게 부상하면서 관민펀드의 역할이 재조명됐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기업 회생을 위한 민간 펀드들이 잇따라 설립됐으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금 차입이 어려워지면서 정부와 시중은행들이 함께 펀드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1990년대 초반 일본 경제 버블 붕괴로 부실채권이 증가하자, 계열기업을 지원하던 주거래 은행들의 건전성 저하로 대출창구를 막았고 1990년대 후반부터 연이어 기업들의 도산이 발생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03년 부실채권 처리와 기업·산업재생이라는 두 가지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산업재생기구법에 근거, 정부계 펀드인 산업재생기구를 설립했다.

자본시장연구원의 현석 연구원은 “관민펀드가 초기에 만든 산업재생기구는 정부가 자금을 거의 다 지원하는 한편 민간 전문가들에게 구조조정 틀을 만들게 했다”고 설명했다. 아베정권이 들어서면서 이 경향은 바뀌었다. 아베노믹스의 성장 전략에 따라 정부가 자금을 지원한 다음 민간의 참여를 유도한 방식이 그것이다.

이후 일본은 부실채권 처리와 산업재생이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정리회수기구, 산업재생기구와 같은 공적기관 설립과 함께 기업 구조조정에 관한 법·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재생절차(우리나라 회생절차) 중인 기업에 관민펀드를 이용해 DIP 파이낸싱을 시작했다. 일본의 관민펀드가 제대로 작동한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항공(JAL)의 도산사건이다.

일본항공은 2010년 8400억엔(약 10조원)의 채무를 진 상황에서 재생절차에 들어갔다. 정부의 지원 없이는 경영 정상화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경영진이 총사퇴하고 새로운 전문경영인이 투입됐다. 이 시점에 관민펀드가 나서 3500억엔을 쏟아부었다. 약 330억엔(약 4조3700억원)의 채무를 탕감하고 극적으로 정상화가 가능하게 됐다.

김두일 유암코 본부장은 “일본 정부가 보증 형태로 자금을 조달하고 채무를 탕감시키는 한편, 전문 경영인의 노련한 경영으로 일본항공이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설명했다. 일본항공은 2년 8개월 만에 재상장돼 주식시장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우리나라는 금융당국을 중심으로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 등이 구조조정해야 하는 기업에 정책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있지만 일본은 정부 주도 하에 국책은행과 시중은행이 펀드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의 현석 연구위원은 “일본의 산업재생기구 역할에 대해서 긍정적·부정적 평가가 모두 존재하지만 초기 산업재생시장 형성에 기여했다는 것은 공통적인 평가”라고 말했다.

한편 정부와 민간기업이 펀드를 조성한 일본의 관민펀드는 지난해 기준 14개가 조성됐으며 산업재생뿐만 아니라 연구개발·이노베이션·지역진흥·해외촉진 등 다양하게 투자하고 있다. 경제성장과 고용 증대를 위해 일본 정부는 산업혁신기구, 지역경제활성화지원기구 등을 마련했고 펀드 각각의 정책적 목표가 있다.

지난해 9월까지 일본 기업 지원을 결정한 출자 안건은 652건으로 실제 투융자액은 약 1조2627억엔에 달한다. 지난 2012년12월 본격 조성된 관민펀드는 민간에 투융자한 금액이 약 2조9127억엔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