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VR에 관련된 발표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발표자는 VR이 가상현실이라고 말하면서 현실에 있는 건물들을 VR 컨텐트로 만든 것들을 보여주고 스포츠 경기를 VR로 만들면 보다 생생하게 스포츠 경기를 관람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뭔가 앞뒤가 안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 오큘러스나 구글 카드보드 등을 이용해서 쉽게 virtual reality (VR)를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virtual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때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 한편으로는 앞의 예와 같이 “가상의” 또는 “허상의” 라는 의미로 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상의” 또는 “실제의” 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그 둘은 상반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the virtual ruler of the country라는 영어 표현은 "한 나라의 실제 통치자"라고 번역을 한다.  a virtual certainty는 “사실상 확실한 사건”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여기서 “실제”나 "사실상"이라는 의미와 앞서 나왔던 Virtual Reality에 쓰인 "가상의"라는 의미는 서로 상반된다.

그렇다면 왜 같은 단어가 서로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언제는 가상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하고 언제는 실제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 동안 우리는 대개 사전에 나온 의미라면 의미들 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지 않고 무조건 외우는 방식으로 공부를 하게 되는데 그런 방식이 평소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다가 이렇게 서로 상반된 의미들을 접하게 되면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 문제가 발생한 원인을 살펴보면, 영어의 virtual이란 단어는 이름은 아니지만 본질적 혹은 사실적 효과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를 지녔는데 동양에서는 이것을 실제와 상반된 개념으로 거짓(仮) 또는 비어 있는 것(虛)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2016년 3월 28일 조선일보에 실린 여명숙 게임물관리위원회 위원장의 인터뷰 기사에 보면 위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좀 더 상세한 설명이 등장한다. "가상(virtual)이라는 말은 영어 표현으로는 '거의 현실인데 2%쯤 부족하다'는 뜻이다. 유독 우리나라만 '가짜(假想)'로 인식하고 있다. 과거에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빌려온 때문이다. 이제 일본 학회에서는 더 이상 가짜를 의미하는 한자어를 쓰지 않고, 'VR'이나 가타카나 표기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리도 가능이라는 뜻을 살려 '가상(可象)'으로 바꾸는 게 옳다. 개념만 바로 잡아도 많은 정책적 모순과 소모적 논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본래의 개념을 적용하면, VR은 거의 현실처럼 보이는(2% 부족한) 현실이 되고 virtual image는 실제 이미지처럼 보이는 이미지가 되고 virtual ruler는 실제 ruler처럼 보이는 ruler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질로 접근하면 앞서 제기되었던 가상과 실제 간의 갈등이 사라지게 된다.

영어는 하나의 단어가 여러 개의 의미를 가지는 다의어다. 그런데 문제는 영한 사전을 보면 하나의 영어단어와 관련된 우리말 의미들이 앞의 virtual이라는 단어의 사례처럼 전혀 상반된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이거나 address처럼 연설하다, 주소, (골프에서) 공을 칠 자세를 취하다 등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의미들을 가지는 경우에 의미들 간의 관계를 유추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나의 영어 단어에 대응하는 여러 의미들을 배워갈수록 영어가 어렵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영어 울렁증을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