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기업들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인권과 다양성의 가치를 담은 예술, 전세계 대중들이 광주와 함께 누릴 수 있는 작품들을 (아시아 문화의) 전당서 계속 제작할 계획입니다. 김희정 아시아 문화의전당 공연사업본부장은 이번 달로 ‘광주 생활 1년째’를 맞는다. 상명대 작곡과 교수로, 문화예술위원회 4기 위원으로, 국제 클래식 음악계에서 인정받는 현대음악 작곡가로 이름난 김 본부장이 아시아 문화의 전당(이하 아문당)에 부임하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 김희정 국립 아시아문화의 전당 공연사업본부장(촬영=천영준)

김 본부장의 부임은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종착점’이어야만 했다. 김희정 본부장은 광주를 문화수도로 도약시킬 수 있는 국제적인 공연 단체들의 작품을 유치함과 동시에 주민들의 눈높이를 맞춰야만 했다. 광주에는 없었던 11시 브런치 콘서트가 매주 선보여졌다. 제야 음악회도 도입됐다. 지역에서 보기 드문 '전석 매진'이 이뤄 졌다. 
2002년 ‘광주 문화수도 육성 사업’이 노무현 전 대통령 공약으로 제시되면서 야심차게 시작한 아문당이었지만 15년 동안 부침(浮沈)이 심했던 게 사실이다. 숱하게 기관장이 교체되고, 2015년 11월 공식 개관 이후 ‘국제적 문화예술 기관’으로 들어섰지만 ‘너무 어려운 예술 콘텐츠가 지역민의 문화 수요에 맞지 않는다’는 논란에 시달려야 했던 것. ‘아문법’(아시아문화중심도시 특별법)의 기조를 흔드는 정치인들도 있었다. 그 뒤로도 각 장르별 예술감독들이 여러 번 교체되며 아문당은 쉽지 않은 길을 걸어 왔다.

‘전라도 방언으로 소화해 낸 맥베스’

“자, 왔는가? 일루 와서 왕관을 뺏어 봐여. 살아있는 눔은 눈에 띄는 대로 비우부려 줄텡게.”  김희정 본부장은 올 4월 ‘전라도 방언으로 상연하는 맥베스’를 아문당에서 기획했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고전 작품을 지역 사투리와 버무린 것. 처음에는 진지한 연극을 괜히 ‘코미디’와 섞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김 본부장은 ‘맥베스 411’을 기획한 배우 안석환의 의도에 깊이 공감했다. 안 씨는 김 본부장에게 ‘문화예술에서 전라도 말이 코미디 소재이거나 주변 인물, 악인의 언어로만 쓰이고 있고, 표준어로만 예술을 할 수 있는지 질문을 제기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맥베스가 영국의 ‘지방’인 스코틀랜드 출신 인물이라는 점도 한 몫 했다. 극작가 셰익스피어가 지역성을 한껏 살려 만들어낸 작품을 지역성이 도도히 살아 있는 전라도의 풍취로 해석해 내는 것이 주효하다고 봤던 것. “전라도는 자부심이 있는 지역이에요. 민주화 운동의 의로움, 지배자에게 굴복하지 않는 당당함, 남도 소리와 같은 고고한 문화 콘텐츠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땅이죠. 그 ‘맛’을 살려 보고 싶었어요.”

김 본부장은 배우 안석환, 코미디 전문 연출가 이해제, 안무가 김윤규 등과 힘을 합쳐 공연을 올렸다. ‘희극’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대중의 기대와는 정 반대였다. 스코틀랜드의 비장함과 전라도라는 처절한 생존의 땅이 지닌 의미가 ‘공명’하며 장엄한 비극을 연출해 냈다.

▲ 아시아문화의 전당 내 전시 시설에 대해 설명하는 김희정 본부장(촬영=천영준)

‘지역과 공존하는 예술 협업 모델’

김희정 본부장이 또 다른 성공 사례로 꼽는 작업은 배우 유인촌(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주연으로 출연하고 연출한 ‘홀스또메르’였다. 유 전 장관은 김 본부장에게 ‘지역 오디션’을 제안했다. 톨스토이의 작품을 지방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는 의미에만 만족하지 말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을 키워 줄 기회를 찾자고 권유한 것.

유 전 장관은 약 두 달 동안 지역에 머무르며 오디션을 진행하고 공연을 위한 연습과 연기 지도에 몰입했다. 음악극의 속성을 갖고 있는 ‘홀스또메르’이기에 연기 못지 않게 노래가 매우 중요하고, 주인공들이 사람이 아닌 ‘말’이기 때문에 짐승의 몸짓을 표현하는 것도 중요했다.

김희정 본부장에 따르면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10명의 지역 배우들은 이 과제들을 매우 성공적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단순히 공연을 올리는 것뿐만 아니라 창ㆍ제작 지원과 공연ㆍ전시를 함께 하는 아문당의 방침 덕분이었다. 신체훈련, 음악훈련 등을 통해 배우들의 연기를 통일하는 작업 덕분에 ‘홀스또메르’는 기술과 극 표현이 고도로 결합된 공연이 될 수 있었다.

김 본부장은 아문당에 부임했을 때 “아문당 때문에 지역 극단이 힘들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고 이야기했다. 열악한 지역 문화 생태계가 아문당 때문에 더 나빠지는 것 아니냐는 이의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 본부장은 아문당이 어디까지나 ‘광주’라는 지역성을 매우 중요하게 고려하는 기관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광주 지역 극장들과 함께 힘을 합쳐 ‘민주화ㆍ인권 영화제’ 같은 작업도 해 볼 것이라고 구상을 밝혔다.

▲ 아시아문화의 전당 내 '예술극장'(촬영=천영준)

‘창의성은 회색 지대에서 나온다’

성공한 예술가이자 공연 행정가로서 열악한 한국 문화예술계의 현실에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있냐고 묻자 김희정 본부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보수적인 한국 문화예술 대학들의 특성 상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가르치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술이 항상 시장의 요구에 복무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죠. 다만 현장에서 뛰다 보면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의 경계가 희미한 경우가 꽤 많다는 것을 체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 현장에서 뛰면서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또 김 본부장은 “창의성은 우리가 알고 있던 특정 영역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여러 영역들이 만나고,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회색지대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문화예술 ODA 전문가이기도 하다. 창작 공연으로 파라과이, 쿠바, 라오스 등을 찾으며 문화 수준이 열악한 지역의 청중들을 만나는 작업을 오래도록 해 왔다. 그러나 김희정 본부장은 “사회 공헌 목적으로 하는 공연이라고 꼭 상업적 성공을 회피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기업이 소화하지 못하는 작품들을 상연하는 것이 공공기관의 소명’

한편 김희정 본부장은 “250억 원이 들어간 대형 뮤지컬처럼 문화예술에서도 블록버스터 작품이 나와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을 꼬집기도 했다. “문화야말로 우리가 평소 생각하지 않았던 다양한 가치들을 일깨워 주는 채널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아문당이 아니면 제시할 수 없는 민주화, 인권, 다양성의 가치들을 계속해서 작품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봅니다.” 또 김 본부장은 상업예술이 아닌 수준 높은 순수 예술 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꾸 좋은 작품을 대중들께 보여드리고, 소개해 드리는 작업을 하다 보면 분명히 어려운 연극이나 클래식 음악도 사랑 받을 날이 온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영화, 콘서트에서만 감동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문화예술의 가치를 많은 분들이 느낄 수 있도록 ‘통역자’ 역할을 해 주는 게 아문당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희정 국립 아시아문화의 전당 공연사업본부장은

1968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했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작곡과에서 음악학 석, 박사를 받았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상명대학교 작곡과 교수로 재직 중(휴직)이며 2016년 봄부터 국립 아시아문화의 전당 공연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4기), 영국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 방문연구원, 외교부 커뮤니케이션 자문단 위원 등으로도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