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인지도가 높은 톱스타들의 하루 평균 쓰는 돈이 약 2000달러(약 220만원)에 이른다고 영국의 데일리미러가 보도했다. 돈의 사용처를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수퍼스타들의 소비에 대한 뉴스들은 우리의 시선을 모으게 만든다.

일부는 하루에 한 끼를 먹기도 어려울 만큼 어려웠던 재정난을 겪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 힙합 스타 윌 스미스(Will Smith)와 엠씨헤머(MC Hammer)가 그렇다.

미국의 스타들의 삶을 나열한 고컴페어닷컴(Gocompare.com)의 `거기에 또다시(There and Back Again)` 코너에서는 유명 인사가 어떻게 극적으로 컴백을 했는지를 상세히 알려준다.

고페어닷컴은 아브라함 링컨부터 마이크 타이슨까지 유명인사의 인생 굴곡을 기록한다. 그들의 삶이 어느 시점에서 몰락했는지, 아니면 언제 다시 스타덤에 올랐는지 여부를 기록한다.

대체 어떤 사람이 파산 위기까지 갔을까. 성공한 13명의 슈퍼스타와 유명인사의 빚 이야기. 스크롤을 내려 확인해보자.

280만달러(약 31억5500만원)를 미국 국세청에 빚진 '윌 스미스'

윌 스미스는 1985년에 미국 유명 힙합 디제이인 DJ 재지제프(DJ Jazzy Jeff)와 팀을 이뤄 데뷔했다. 그는 첫 앨범인 ‘He’s The DJ, I’m The Rapper’을 발매해 1989년에 플래티넘 앨범을 기록하며 대박을 쳤다.

윌스미스는 이 앨범으로 하룻밤 사이에 백만장자가 됐다. 백만장자가 된 윌스미스는 고급 외제차와 미국의 강남이라고 불리는 비버리힐즈에 집을 사면서 엄청난 지출을 시작했다. 문제는 자신의 자산 관리를 소홀하면서 시작됐다. 지출을 남발하면서 세금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미국의 국세청(IRS)는 그에게 280만달러(약 31억5500만원)이라는 금액을 세금으로 청구했고, 윌스미스는 이를 갚기 위해 당시 보유한 모든 재산을 국가에 양도해야만 했다.

빈털터리가 된 윌스미스는 운이 좋게도 금방 파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든 재산을 탕진한 윌스미스는 1년 뒤인 1990년에 미국 방송사 NBC에서 ‘벨에어의 프레시 프린스(The Fresh Prince of Bel-Air)’에 주연으로 데뷔,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하며 파산상태에서 탈출했다.

◆ '레이디가가'는 월드투어를 두 번이나 했지만 39억의 빚을 졌다

‘팝의 여제’라 불리는 레이디가가(Lady gaga)는 파산을 극적으로 면한 슈퍼스타다. 지난 2009년 ‘몬스터볼(Monster Ball)’투어에 나섰다. 그녀는 이 투어를 하면서 높은 인기로 세계를 두 바퀴나 돌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정작 그녀의 손에는 300만달러(약 36억원)이라는 적자 영수증만 들려있었다.  

그녀는 결국 미국 뉴욕 연방법원에 파산을 신청했는데, 연방법원에 제출한 그녀의 파산 사유는 무대 제작과 의상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것 때문이었다.

◆ '마이크 타이슨', 전 부인에 날린 펀치 사고로 파산신청까지 가

‘핵 주먹’과 ‘핵 이빨’이라는 별명을 동시에 가진 마이크 타이슨(Mike Tyson)은 1997년 헤비급 타이틀 매치에서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으면서 패배와 동시에 인생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 일로 타이슨의 스폰서는 계약을 철회했고 복싱계 은퇴를 선언했으며, 이후 돈벌이도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문제는 은퇴 이후 괴팍한 성격 탓에 아내를 두들겨 패고 천문학적인 위자료를 지급해야 하는 일이 생겼고, 더욱이 그의 과소비에 가속이 붙으면서 결국 2003년에 미연방 파산법원에 파산을 신청했다.

타이슨은 20년의 복싱 경력 동안 약 3억달러(약 3400억원)를 벌었다. 타이틀 획득 후 16년만에 파산했으니 단순 계산으로 1년 동안 210억씩 돈을 쓴 셈. 그는 파산을 신청했을 당시 약 2300만달러(약 259억2100만원)의 빚을 가진 악성 채무자였다. 그의 빚은 미국 국세청에 약 1340만달러(약 151억), 영국 세무당국에 400만달러(약 45억원), 위자료 900만달러(약 101억원)로 구성돼 있었다.

그러나 타이슨은 한 미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내 평생 최고의 펀치는 로빈(타이슨이 위자료를 줘야하는 부인)에게 날린 바디 블로우”라고 말하는 걸 보면, 아직도 반성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 6번 기업회생을 신청한 파산전문가 ‘도널드 트럼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뉴스에 얼굴을 비추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은 총 6번이나 파산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인 파산 혹은 회생을 신청한 일은 없지만, 그의 회사가 6번이나 기업회생을 신청했다.

트럼프의 6번에 걸친 재기는 1991년 미국 연방법원에 제출한 기업회생 신청부터 시작된다. 당시 그는 애틀랜틱 시티에 위치한 트럼프 타지마할 카지노의 유동성 악화로 인해 처음 기업회생을 신청했다. 이후 1992년에 카지노와 호텔 등이 다시 기업회생에 들어갔고. 2004년과 2009년에 두 차례 더 신청했다.

트럼프는 미국 애틀랜틱 시티에서 타지마할이라는 호텔을 1990년 4월 개장했으나 곧장 유동성 위기가 찾아와 1991년 7월에 첫 파산을 신청했다.

그가 보유한 트럼프 플라자&카지노와 트럼프 캐슬도 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채 1992년에 기업회생을 신청했다.

네 번째 파산은 같은 해 뉴욕의 플라자 호텔이었고, 트럼프 호텔 앤 카지노 리조트가 약 18억 달러의 부채로 2004년에 다시 파산 신청을 하면서 다섯 번의 기업회생을 신청하게 됐다.

그러나 그의 파산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트럼프는 2008년 금융위기에 자산상 위기를 맞았고 트럼프는 2009년에 트럼프 엔터테인먼트 리조트의 파산을 선언. 총 6차례 파산을 신청했다.

특이한 점은 트럼프는 6번의 기업회생을 신청했지만, 1991년 첫 회생신청 이후 17년 동안 우리나라 돈으로 약 3조원에 달하는 재산을 모았다. 이는 단순히 계산해보면 1년에 연봉 약 1700억원을 받아 17년동안 한 푼도 안 쓴 셈이다. 기업의 파산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건재한 것은 기업이 파산해도 대표자가 연대 파산하지 않는 미국의 파산제도가 한 몫을 담당했다. 트럼프의 파산신청과 재기를 보며 우리나라 파산법을 손질하자는 파산법조인의 주장도 있다.

◆ 미국 힙합 뮤지션 '50센트', 얼마 전 개인회생에서 벗어나

2003년 월드 베스트 아티스트상을 비롯해 가장 많은 수상한 미국 힙합 뮤지션인 50센트(50cent, 본명 커티스 잭슨 3세)는 2015년에 미국 코네티컷 파산 법원에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그는 2000년 4월 9발의 총을 맞고 혀가 잘려 래퍼로서 인생을 마감하는 듯했으나, 갖은 노력 끝에 미국 래퍼 에미넴의 도움으로 ‘In da Club’이라는 노래를 발매, 큰 인기를 얻었다. 2000만 장이 넘는 앨범을 판매하며 50센트는 1억 5500만달러(약 1740억원)의 자산가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힙합가수’ 5위에 오른 바 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잦은 마약 범죄와 갱스터 싸움에 휘말리던 그는 자산을 탕진하기 시작했고, 그는 헤드폰 사업에 투자했다가 허술한 경영으로 인해 연이은 패배의 쓴맛을 맛봤다. 결국, 수천만 달러의 채무를 얻게 됐는데, 여기에 그의 전 여자친구 섹스테이프를 온라인에 유출하면서 법원으로부터 손해배상 지급 판결을 받아 81억원이라는 채무를 추가했다. 결국 그는 총 3600만달러(약 420억원)의 채무를 짊어지게 됐고,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50센트는 올해 2월 법원으로부터 개인회생을 졸업했다. 2년의 회생기간에서 2200만달러(약 247억원)를 변제해 내 조기에 회생을 마칠 수 있었다.

◆ 계약 위반 고소로 개인회생 신청했던 ‘킴 베이싱어’

샤론스톤의 라이벌이자 섹시하고 관능적인 여배우로 유명했던 킴 베이싱어(Kim Basinger). 잘나가던 그녀도 한순간에 몰락했다. 킴 베이싱어는 ‘복싱 헬레나’ 영화 출연을 거부하면서 망조의 길을 탔다.

그녀는 영화를 기획해온 ‘메인 라인 픽처스’와 계약까지 다 마친 상태였지만 “영화 내용이 계약 당시와 달라졌으며 너무 선정적”이라며 “자신이 원하지 않은 계약을 에이전시가 했다”라는 등 갖가지 이유를 대며 계약을 위반한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결국 영화사는 킴 베이싱어를 계약 위반으로 고소했고, 법원은 킴 베이싱어에게 810만달러(약 91억4000만원)를 변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810만달러라면 천문학적인 수준의 금액이었다.

이 돈을 낼 길이 없었던 킴 베이싱어는 1993년에 미국 연방 파산법원에 파산신청을 했고 영화계에서도 한동안 사라졌다. 당시 미국 연방 파산법원은 킴 베이싱어의 채무를 380만달러(약 43억원)까지 감면해 주었다.

재정적인 곤란함에 영화인생까지 저당 잡힌 킴 베이싱어는 4년 후 비로소 재기에 성공했다. 바로 커티스 핸슨 감독의 스릴러 영화 ‘LA컨피덴셜’에서 여주인공을 맡으면서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암흑 조직의 거물들과 얽히고설킨 여인 연기를 완벽하게 해내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상, 배우조합 여우조연상을 휩쓸었다. 고생 끝에 할리우드의 주류로 컴백한 그녀는 현재 3600만달러(약 406억3000만원)의 순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 '월트 디즈니'는 그가 세운 첫 회사를 기업회생 신청해

디즈니랜드와 미키마우스를 구상해낸 세계적 유명인사 월트 디즈니(Walt Disney)도 파산법정에 발을 들인 전적이 있다.

디즈니는 아이웍스라는 그의 친구와 ‘러프-오-그램(Laugh-O-Gram)’이라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함께 차렸다. 이 회사는 디즈니가 직접 설립한 첫 회사다.

디즈니와 아이웍스는 의기투합하여 애니메이션 산업에 뛰어들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 애니메이션이라는 분야는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을뿐더러 시간과 비용 등을 계산하여 회사를 운영하기엔 경영지식도 부족했다.

게다가 이 스튜디오는 배급사에 사기를 당하면서, 스튜디오 근로자들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처했다. 결국 디즈니는 1923년 이 스튜디오에 대해 파산(당시에는 회생과 파산의 구분이 없었다)을 신청했다.

비록 파산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디즈니는 할리우드에 위치한 여러 영화사를 방문하며 자신의 애니메이션을 홍보했다. 이에 할리우드 최초 여성 배급자였던 마거릿 윈클러를 만나 형 로이 디즈니와 함께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의 첫 간판을 달게 됐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마거릿 윈클러의 남편이 디즈니 형제들로부터 사업 자금을 빼돌리고, 소속된 애니메이터들까지 데려가 회사를 차렸다.

당시 법적 소송을 할 자금 여력이 없었던 디즈니는 뉴욕 배급사의 계약 해지까지 듣게 된다. 절망에 빠진 디즈니는 뉴욕 배급사와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쥐를 주인공으로 한 ‘Plane Crazy(미친 비행기)’라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게 되는데, 디즈니는 할리우드로 돌아와 Plane Crazy 시나리오를 아이웍스에게 보여줬고, 모티머라는 쥐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수정과 보안을 거쳐 현재 월트 디즈니사의 대표 캐릭터인 미키마우스가 탄생해 냈다. 이후 월트 디즈니는 역사가 됐다.
 

◆ '신디 로퍼'는 1981년 매니저의 고소이후 파산

1980년대에 혜성처럼 나타난 여성 싱어송라이터 신디로퍼(Cyndi Lauper)는 1978년에 색소폰 연주자 존투리(John Turi)와 함께 밴드 블루엔젤(Blue Angel)을 결성했다. 신디로퍼는 블루엔젤에서 4년 동안 보컬과 작곡을 담당했다. 하지만 신디로퍼는 밴드 매니저인 스티브 매사르스키(Steve Massarsky)와 잦은 분쟁을 벌였고, 흥행궤도에 오르지 못하자 밴드를 해체했다. 해체 뒤 매니저인 매사르스키는 신디로퍼를 밴드 분쟁을 일으킨 주범이라며 고소했다. 변호사 선임비용조차 없었던 신디로퍼는 결국 1981년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이때 신디로퍼가 진 빚은 약 8000만원 이었다.

신디로퍼는 미국 패밀리 레스토랑 IHOP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빚을 갚아 나갔다.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하던 신디 로퍼는 1983년 그녀의 솔로앨범 “She's So Unusual”을 발매했고, 타이틀 곡인 “Girl 's Just Have Have Have Fun”을 통해 스타 뮤지션 반열에 올랐다.

특히 신디로퍼는 미국 4대 엔터테인먼트 상(EGOT; 에미상, 그래미상, 오스카상 및 토니상)중 3개를 받은 뮤지션으로 유명하다. EGOT 상을 3개 이상 받은 미국 연예인은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현재 그녀의 재산은 약 3000만달러(약 338억원)에 이른다.

◆ 아브라함 링컨, 파산 없이 부채를 극복하고 대통령이 된 사나이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도 부채를 극복하고 대통령이 된 대표적 인물이다. 1823년 20대였던 링컨은 일리노이주 뉴살렘(New Salem)에 작은 잡화점 하나를 사들여 운영했다. 잡화점 이름은 같이 동업했던 그의 친구 이름과 합쳐 ‘링컨·베리’라고 지었다. 당시 미국 경제가 워낙 호황을 누리고 있던 시기여서 이 흐름을 이용해 잡화점을 성공시키려 했지만, 불행히도 링컨의 잡화점은 시대 흐름을 타지 못했다.

계속되는 매출 감소에 링컨은 1833년에 잡화점을 폐업해야만 했고, 링컨에게 돈을 빌려줬던 채권단은 그에게 1000달러(약 110만원)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게다가 그의 동업자인 배리마저 사망하면서 모든 빚이 그에게 쏠렸다. 당시는 파산법이 없었기 때문에 링컨은 그가 보유했던 말과 가게 장비, 집에 있는 식기들을 팔고 다른 일들을 계속하면서 빚을 갚아나갔다.

 결국 링컨은 폐업 이후 17년만인 1850년에 모든 빚을 청산했다. 이 기간에 링컨은 국회의원, 우체국장, 측량기사 등의 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법률공부를 하여 변호사 자격증까지 따냈다.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한 토머스 제퍼슨, 율리시스 그랜트, 윌리엄 맥킨리도 파산을 경험했던 미국 역대 대통령이다.

◆ 토크쇼 스타  '래리킹', 그도 개인회생 신청해

래리 킹(Larry king)은 그의 사업 동반자였던 루울프슨(Lou Wolfson)으로부터 5000파운드의 절도죄로 고소당했다. 이 문제로 래리 킹은 방송 업계에서 3년동안 제명당한다. 그는 이후로 일거리를 찾지 못했고, 채무는 계속해서 늘어갔다. 1978년에 그의 빚은 약 35만달러(약 4억원)까지 불어났고, 빚을 갚을 길이 없었던 래리킹은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그러나 그해 말 래리킹은 무츄얼 브로드캐스팅에서 사회자를 맡아줄 것을 제안받아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래리킹쇼(Larry King Show)’로 컴백, 이후  25년 동안 방송을 진행했다. 물론 빚도 이 기간 동안 전부 청산해냈다.

◆ 흑인음악 대부 '마빈 게이', 이혼 위자료 때문에 회생 신청해

흑인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미국의 레전드 싱어송라이터 마빈 게이(Marvin Gay). 그는 1976년 전 부인인 애나 고디와 이혼하면서 위자료로 약 60만달러(약 6억7500만원)를 지급하지 못해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마빈 게이는 이 빚을 청산하기 위해 앞으로 앨범 계약을 하며 받는 선지급금을 전 부인에게 지급하는 것을 법원에 동의했다.

이후 마빈 게이는 이혼 문제와 경제적 파산을 겪으며 쓰라린 개인적 고뇌를 담은 앨범 ‘Here, My Dear’를 발표하였으나 인기가 좋지 못했다. 그 후 1982년 10월에 앨범 ‘Midnight Live’를 발표, ‘Sexual healing’이라는 곡이 히트하는등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마빈 게이는 잭슨5(Jackson 5),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 보이즈 투 멘(Boyz II Men) 등 걸출한 미국 소울음악계 거물들과 함께 모타운 레코드의 핵심인물이 되어 미국 음악을 주도해 나갔다.

그는 45세가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에게 총을 맞아 사망했다.

◆ 화장실을 금으로 도배했던 '엠씨헤머', 결말은 파산

미국 힙합 뮤지션 엠씨 해머(MC Hammer, 본명 스탠리 커크 버렐)는 엄청난 과소비로 인해 파산했다.

그는 1990년 발매한 ‘Please Hammer Don't Hurt'Em’의 수록곡 ‘U can't touch this’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스타가 됐다. 이 앨범은 판매량만 1200만장을 넘어섰다. 그는 이 노래 하나만으로 1990년에만 약 3300만달러(약 371억원)를 벌었다.

그러나 1996년에 엠씨 해머는 1000만달러(약 110억원)의 부채로 인해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그의 부채는 대부분 과소비 때문에 생긴 일이다.

엠씨해머는 초호화 저택을 구입해 바닥을 전부 대리석으로 덮고, 자신의 저택 관리에 200명이 넘는 인력을 투입했다. 심지어 화장실은 전부 금으로 도배하기도 했다. 그는 인기를 이용해 음악 회사도 만들었지만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망해버렸다.

◆ 원조 핵주먹 권투선수 '조지포먼', 자금난 해결 위해 링위에 다시 올라서

1970년대 미국 복싱의 전성기를 이끌던 ‘원조 핵주먹’ 조지포먼은 약 500만달러(약 56억원)의 돈을 벌었다.

절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포먼은 목사가 되기 위해 1977년 은퇴를 선언, 미국 텍사스로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어려움에 처한 어린이들을 도울 청소년 센터를 설립했지만, 경영 지식이 부족해 계속된 자금 유동성 문제에 시달렸다.

결국 그가 운영하던 청소년 센터의 부채로 인해 포먼은 파산 직전까지 가게 된다. 하지만 포먼은 청소년 센터를 계속 운영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 10년만에 링에 다시 올랐다.

37살이라는 나이에 복싱계로 돌아온 그는 헤비급 신인이었던 스티브 즈와스키를 4회 KO로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포먼은 23경기를 내리 이겨내며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포먼이 1997년 섀넌 브릭스와 경기에 패배하며 복싱계에서 영원히 은퇴했다. 은퇴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은퇴 이후 포먼은 요리기 및 주방용품 사업을 하는 살톤(Salton)사와 계약을 맺고 ’조지 포먼 그릴’이라는 전기 그릴 판매 계약을 체결했다. 포먼은 이 사업 덕에 약 2억달러(약 2250억원)을 벌어들였다.

성공한 사업가로 거듭난 포먼은 위기에 처했던 청소년 센터를 운영하며, 텍사스에 위치한 교회 목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