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리 시대인 지금은 상상키 어렵지만,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16%의 고금리 예금상품이 시중에 나올 뻔했다. 이 상품을 기획했던 지인은 만일 시중에 나왔다면 은행의 역사가 지금과 달라졌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물론 그보다 4년 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 25%대 이상의 고금리 상품이 더러 있었다. 자기자본 부족의 금융회사는 예금 상품으로, 기업은 회사채로 25% 이상 금리를 지불하겠다며 급전을 구하는 형국이었다. 경제위기가 가시고 경제가 안정되어 가는 시점에 뜻밖에 한 시중은행이 16%의 고금리 예금 상품을 기획했던 것. 이벤트는 바로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대한민국 16강 진출 기원’ 예금상품 출시였다.

당시 우리나라 팀의 16강 진출이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만큼 모 시중은행(은행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이 은행의 현 경영진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 준비한 상품의 의도는 ‘소비자 우롱(?)’일 수 있지만, 실제 기적은 일어났지 않는가. 은행은 대신 16강 진출에 실패하면 당시 6% 시중금리보다 낮은 4% 금리를 지급하겠다는 조건도 붙였다.

이 상품 개발 과정에서 리스크 측정은 이랬다. 대한민국 팀이 16강에 진출할 가능성은 25%, 역대 월드컵에서 개최국에 예측된 진출 확률 중 최하였다. 진출 가능성이 적었기에 실패 시 4%와 시중금리 6% 차이인 2%P 범위 내 재원을 활용, 보험에 가입해놓으면 ‘기적’ 발생 시 보험금(16% 금리 지급 비용)을 감당하기에 충분하다는 게 은행 측 계산이었다.

하지만 그 상품은 끝내 출시되지 못했다. 만약 출시됐으면 이후 벌어졌을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큰 돈을 예금에 가입했다면, 그 자산가는 정말 로또 당첨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은행은 보험사에 이를 다 보전받았을 터이다. 보험사는 다시 재보험사에 보험을 들어둔 터라 큰 부담 없을 것이다.

이 상품의 아이디어가 혁신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금상품을 파는 은행과 리스크를 활용하는 보험회사 간 결합을 노렸다는 이유에서다.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기적만큼 금융상품 세계에서도 기적의 ‘맹아’를 상상해본다. 이로 인해 혁신이 시작됐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험사가 막판에 주저하는 바람에 그 상품은 빛을 보지 못했다.

다른 의미의 혁신적인 금융상품이 이보다 2년 전 세상을 실제로 휩쓸었다. 한국 최고의 부자 동네인 강남 지역을 휩쓴 은행은 바로 홍콩상하이은행(HSBC) 한국지점. 당시엔 은행 이름도 낯설어 일제 강점기 시절을 연상시키는 이 은행은 IMF 외환위기 상황이 가라앉자 강남 은행권에서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로 부상했다. 그 은행이 내놓은 금융상품은 시중은행들의 그것과는 여러 모로 다른 부동산담보대출상품이었다.

먼저, 처음으로 CD(양도성예금증서)에 연동하는 낮은 금리를 대출금리 기준으로 적용하는 조건이었다. 더욱이 대출용 담보에 대한 근저당 설정비를 소비자가 아닌 은행이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설정비가 대출금의 1%이었기에 호응은 컸다.

그리고 아파트담보에 대해 HSBC는 직접 종합재산보험에 가입, 만일의 사고에 대한 리스크를 헤지해줬다. 담보가치 보전이라는 은행 이익도 계산했는데, 강남 아줌마들은 이 은행의 세심한 배려라며 감동했다. 이런 대출조건들은 당시 시중은행에는 전혀 없던 것이었다.

HSBC는 이 틈을 더욱 파고들어 시중은행의 기존 대출에 대한 대환 대출까지 끌어들였고, 최고 신용등급이었던 강남 아줌마들을 수년 동안 붙잡아놓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시중은행들은 2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은행 설정비 부담, CD금리 연동 상품을 내놓았다.

당시 이 상품을 기획했던 전직 금융인은 “정말 선풍적인 인기였다”며 “당시 그 지역에서 월 300억원의 대출계약을 올린 직원도 나올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최근 카카오뱅크의 여수신을 이용한 소비자들 60% 이상이 1~2등급의 고신용자들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HSBC 사례에서 보듯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지는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금융산업의 혁신은 어떻게 이뤄질까. 작은 혁신의 연습과 혁신 아이디어의 배출과 적용이 큰 혁신을 이끌어낼 것이다. 엄청난 혁신적 사고는 일상적인 훈련으로는 개발되지 않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혁신을 이루려는 훈련과 노력이 거대한 혁신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지금 우리 금융산업은 혁신의 연습을 하고 있는가. 현재 최고경영자들의 각축은 혁신적 전략가들의 군웅할거인가, 빈약한 아이디어 소유자들의 밥그릇 싸움인가. 그리고 그들은 잠재적 혁신가를 키우고 있는가, 내쫓고 있는가.

회계 전문가 출신 최고경영자는 숫자로 자신의 업적을 부풀리고, 영업맨 출신은 영업이 전략이라는 어이없는 사고를 강요하고 있다. 또 은행장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직개편에 혈안이 된 리더도 있다.

최근 만난 금융권 인사는 “최고경영자들이 자리싸움만 하다 보니, 한국 금융산업이 가축화됐다. 글로벌 전략과 혁신을 추구하는 리더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고 개탄했다. 빈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