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10월 2일, 팔월 스무이레, 甲寅일로서 偏財가 偏財를 대동하여 寅午戌삼합으로 用神관을 키우는 날이다. 날씨는 맑고, 경상우수사(원균)와 함께 의논하고 배를 옮겨 거제 칠내도(漆乃島)에 이르자 웅천(熊川)현감 이종인(李宗仁)이 와서 이야기 했다. 들으니 왜의 머리 서른 다선 개를 베었다고 했다. 저물녘에 제포(薺浦), 서원포(西院浦)를 건너니 밤이 벌써 이경인데, 서풍이 차게 불어 나그네 마음이 산란했으며 이날 밤에는 꿈자리도 어지러웠다.”

“네, 1592년 10월 3일, 팔월 스무여드레, 乙卯일로서 正財가 正財를 대동하여 午卯파살을 이룬 날입니다. 날씨는 맑고, 새벽녘에 앉아 꿈을 생각해 보니 처음에는 나쁜 것 같았으나 도리어 좋은 것이었다. 가덕으로 갔습니다.”

임진년의 일기는 이것으로 끝인데, 팔월 스무아흐레부터 섣달그믐까지와 癸巳년 정월 스무아흐레까지 즉 1592년 10월 4일(팔월 스무아흐레)부터 1593년 3월 1일(癸巳년 정월 스무아흐레)까지 117일분의 일기가 빠졌다. 이 부분을 다시 이순신세가의 기록으로 짚어보자.

“팔월 스무나흘에 장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전라도 조방장 정발(정발이 조금 후에 충청수사가 된 것은 조정에서 이순신장군의 부산싸움에 실제 동료로 수전을 한 장수라 함이다.)과 함께 160여 척의 연합함대를 거느리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위무당당하게 제4차 원정의 길을 나섰다는 것이다.”

“네, 그날은 남해도 관음포에서 밤을 지내고 25일에 경상도 사량바다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서로 만났는데, 원균은 한산도에 상륙하여 굶어 죽게 된 적병 4백여 명을 살려준 이적행위의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장군이 자기보다 나이가 다섯 살 아래라고 속으로 업신여기고 명령을 우습게 안 죄는 사형감이었다. 원균이 한산도를 지키라는 명령을 얻었으면 분기탱천해야 할 사람이 적선이 보인다는 소문을 듣고 놀라 겁을 먹고 본인의 함대를 몰고 서쪽 사량으로 달아나는 것을 보고, 적은 나무를 찍어 떼배를 만들어 거제도로 달아난 것이니, 그 죄가 얼마나 무거운가?”

“네, 장군은 원균을 만나 경상도 연해에 적의 출몰유무를 물었으나 그는 상세한 대답을 못하고, 또 모른다고 할 수도 없으니 어물어물하다가 아는 체하는 것을 본 장군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짐작했고, 더구나 그가 배를 바다에 놓아 조선어선을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조선 사람의 목을 베어 상투를 풀어 일본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바꿔쳐서 적병을 잡은 듯이 수급을 모은다는 보고를 들은 장군은 원균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해적, 일본 놈보다 더한 짓이었기에 장군이 참수를 내렸어야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계급이 같다 보니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사실은 선조가 알아서 해야 했다. 현 시대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과거사 정리를 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 대한민국의 국민은 민주주권을 찾기 위해 과거사 정리를 모두 원했으나 그것을 처리하지 못한 결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수많은 비리,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과 무능은 나라를 절단 내고 있는 상황이고, 더욱 더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말장난의 시대를 열어 국민들 간에 이간질을 시키고 논쟁을 일으키는 친일파의 숨은 모략정치가 방송과 신문, 교육을 통해 역사를 왜곡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 정치는 머리가 좋은 놈들이 윗자리에 앉아 모략과 이간질을 시켜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네 이익만을 챙기는 것이 권력의 모순이다. 선조도 마찬가지로 무능하여 수많은 충신을 죽인 逆民의 왕이다. 이런 권력을 가진 자에게 당하지 않는 방법은 하나다. 그것은 역학으로 자신의 사주를 보고,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