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제공= 쇼박스

배우 설경구 만큼 영화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을 다 누린 이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 것이다. 지금은 관객 1000만 영화가 많지는 않아도 1년에 한두 작품은 나오지만 몇 년 전만해도 1000만 관객은 마치 꿈과 같이 여겨진 일이었다. 설경구는 우리나라 최초의 1000만 관객 영화 <실미도>(2003)의 주연 배우였다. 이후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해운대>(2009)가 또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그에게는 ‘1000만 배우’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얼마 전에는 영화 <불한당>으로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연기 인생에서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관객들을 맞는다. 다른 배우도 아니고, 연기력으로는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설경구가 연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니. 그 내막이 궁금해졌다. 설경구는 "저는 그 긴장감을 잃지 않으려고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저를 옭아매는 편"이라면서 "연기에 배우의 고민을 투영하는 저만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31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설경구를 만나 이번 작품, 그리고 연기에 대한 그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살인자의 기억법>이 시사회에서 공개됐습니다. 영화는 잘 보셨나요? 

아니요(단호하게). 제대로 못 봤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제가 나오는 장면들을 관찰하느라고 영화를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어요, 아마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뭐랄까, 자기 얼굴이나 목소리를 영상으로 찍어서 볼 때 뭔가 이상해보이고 어색해보이고 그런 느낌이 있잖아요. 영화를 보는 내내 저 장면은 왜 저렇게 연기했을까...조금 더 잘 할 순 없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어요, 그만큼 주인공 캐릭터를 연기하기 어려워서였는지도 모르죠. 아무튼 좀 그랬어요.

주인공이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것 때문 아니었을까요? 

그것도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알츠하이머를 경험해 본 사람도 아니고요, 심지어는 연기로도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주인공 ‘병수’를 어떻게 하면 관객 여러분들에게 어색하게 보이지 않을지 연구했죠. 의학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기도 하고 주변 분들에게 조언도 구하고요. 그런데요. 진짜 어려운 점은 그게 아니었어요.

▲ 사진 제공= 쇼박스

어떤 점이 그렇게 어려우셨나요? 

주인공 캐릭터의 복잡한 성격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였어요. 원신연 감독에게 작품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부터 주인공 캐릭터가 너무 맘에 들어서 단박에 출연하기로 결정했죠. 제가 지난 작품들에서 표현해 온 캐릭터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 어떤 면에서 도전도 됐고요. 그런데 막상 연기를 해 보니 주인공의 성격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도무지 모르겠는 거예요. 심지어는 50대 후반인 주인공의 얼굴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가를 가지고 원신연 감독과 며칠을 고민하기도 했어요.  

가뜩이나 주인공 병수라는 인물은 알츠하이머 증상이 나타났다가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인물입니다. 이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저에게는 주인공은 같은 사람인데 마치 1인 2역처럼 연기해야 하는 묘한 상황이었죠. 거기다가 영화 촬영이 시간 순서가 아닌 장소의 변화에 따라 진행되는 바람에 캐릭터 성격이나 감정의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다른 영화들을 찍을 때는 하루 촬영을 마치고 나면 그래도 ‘내일은 어떻게 연기 해야겠다’는 판단이 섰었는데 이번 작품은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들었어요. 뭔가 연기는 아쉬운데 하루하루 어떻게 어떻게 촬영은 진행되는. 그런 일정들이 반복되다 보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고민을 해결하셨나요? 

고민이 생길 때마다 원 감독님과 계속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장면에 따라 주인공의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는가에서부터 겉으로 보이는 모습, 의상까지. 그러다 보니 촬영이 진행될수록 점점 나아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더 나가서는 영화 내용 전개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저의 아이디어도 반영했죠. 이를테면, 주인공에게 알츠하이머 증상이 오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신체 반응들은 원작 소설에는 없는 부분이지만 제가 생각해 낸 연기였고요.

그 정도로 애를 쓰셨으면 영화를 빨리 보고 싶지 않으셨나요? 

편집되기 이전의 영화를 볼 기회는 있었죠. 주변에서는 제가 어떤 고생을 한 줄을 아니까. 몇 명이 권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왠지 보기가 싫더라고요. 가능하면 보기 좋게 편집된 버전을 봐야 그나마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그래서 시사회 날 영화를 처음으로 봤습니다. 아유, 그래도 잘 못 보겠더라고요. 부담스러워서. 연기할 때 고민한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몇몇 장면에서는 손이 오글거릴 정도였습니다.

‘무려’ 설경구라는 배우가 자기 연기를 부끄러워했다니.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생각을 해보면 ‘본인의 연기가 어땠는지’를 다른 배우들에게 물어도 아마 100% 맘에 들었다고 답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저도 그와 비슷한 생각인데 아무래도 연기하는 과정이 어려웠다 보니 더 부담감이 있는 거죠. 혹시 있었어요? 자기 연기 맘에 들었다고 이야기하는 배우?

▲ 사진 제공= 쇼박스

아. 생각해보니 없는 것 같긴 하네요. 

그렇죠?(웃음)

한 인터뷰에서 “배우는 늘 고통에 몸부림쳐야하는 직업이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요. 연기 때마다 본인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본인의 연기관이신가요?  

영화배우들이라면 사실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좀 따분한 말 일수도 있는데요. 저 개인으로는 배우가 고민 없이 연기를 하면 그 누구보다 빨리 그 부족함을 알아채는 것은 관객 여러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기에는 늘 긴장감이 필요하죠. 그것은 연기 경력이 몇 년인가 또는 몇 편의 영화에 출연 했는가 하고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라고 봅니다. 배우들이 ‘카메라가 돌아가면 눈빛이 달라진다’고들 하죠? 그것과 비슷한 맥락이에요. 저는 그 긴장감을 잃지 않으려고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저 자신을 옭아매는 편이에요. 연기에 배우의 고민을 투영하는 저만의 방법입니다. 물론 모든 배우들이 저처럼 막 극한의 상황으로 자기를  몰고 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렇더라고요.

이번 영화, 흥행에 대한 부담감도 크시겠어요. 

말~도 못하죠. 어마어마합니다. 죽겠어요 아주(웃음)

한 온라인 방송에서 <살인자의 기억법>이 300만 관객을 돌파하면 알츠하이머 환자분들을 위해 기부를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영화가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조금 충동적으로 한 제안인데요. 흥행이야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꼭 기부를 하고 싶습니다. 그것도 가능하면 아주 많이요.

어떤 배우로 관객들이게 기억되고 싶으세요?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욕심 많은 배우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더 들어서도 말이죠.

<살인자의 기억법> 대박나셔서 꼭 기부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