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쑥하게 정장을 잘 차려입은 사람이 으리으리한 건물의 정문으로 들어가려고 출입증을 대는데 작동이 되질 않는다. 이상한 듯이 다시 출입증을 이리저리 대어보더니 무슨 일인지 알았다는 듯, 체념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왔던 길을 돌아가는 모습은 금융위기 과정에서 미국의 TV뉴스에서 흔히 보이는 장면이다.

기업의 실적이 하락하고 이윤이 급격히 낮아지면서 인력 구조조정에 들어가 직원들을 해고하는 것이다. 해고를 당하는 직원들은 이렇게 회사 문 앞에서 출입을 하지 못하게 되면 해고당했구나 하고 알게 되기도 한다.

영화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직장 내 해고의 모습은 다양하다. 상사가 갑자기 예정에 없던 회의가 있다면서 불러들인다면 긴장하는 이유도 예고 없는 해고 통지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시장 상황이 좋지 않거나 해당 산업 전체의 업황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부서나 팀의 전체 인원이 한꺼번에 불려가 일시에 해고를 당하기도 한다.

직접적으로 얼굴을 마주하기 불편해 하는 상사들의 경우 이메일로 통보를 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해고를 전담으로 맡아서 통보하는 회사에 맡기기도 한다. 이들은 해고 전문가들로 해고예정자들에게 회사의 결정을 통보하고 그들이 앞으로 할 수 있는 대처 방안들을 안내해주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한다. 해고 통지를 받으면 짧게는 몇 시간 내에 자신의 소지품과 일들을 정리하고 회사를 떠나야 한다.

한국에서는 해고를 하기보다는 자진 퇴사를 유도하는 경우가 많고 회사 사정으로 인력조정이 필요할 때는 미리 당사자에게 언질을 하고 다른 자리를 찾는 시간을 주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해고는 ‘예고 없이’ 그냥 들이닥쳐서 마치 뒤통수를 맞는 것과 같다는 비유가 적절할 듯싶다.

이는 정식 고용계약서 없이 연봉과 처우 등이 적혀 있는 오퍼레터로 일하는 임의고용(at Will) 방식으로 취업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임의고용 방식은 말 그대로 고용인이 원치 않으면 아무 때나 타당한 이유 없이도 해고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 고용계약서가 있는 경우에도 고용 기간이 명확히 표기되어 있거나 특별한 해고 사유를 명시하고 이 경우에만 해고할 수 있다고 따로 정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고용계약서에서 해당 고용관계는 임의고용 방식으로 간주된다.

사실상 거의 모든 고용이 임의고용 방식이다 보니 해고 한 달 전에 미리 이야기해서 시간을 벌어준다거나, 해고가 아닌 퇴직으로 유도한다거나 하는 한국 방식을 볼 수 없고 해고되는 당일 통보받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해고 사유도 그야말로 아무것이나 대기만 하면 될 수 있다. 미국 내 50개 주 가운데 49개 주에서 직원을 해고하는 데 있어 정당한 사유나 타당한 근거가 없어도 해고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과장하자면 직원이 입은 옷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직원이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팀의 경쟁팀을 응원한다는 이유만으로 해고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직원들을 해고에서 보호해줄 수 있는 부분은 인종이나 나이, 성별 등의 이유로 해고할 수 없다는 점인데, 성적 지향과 관련해서는 이런 차별 조항이 없어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해고가 가능하다.

한국에서 보이는 미국의 직장생활은 야근이나 회식이 없어서 저녁이 보장되고 일과 삶의 균형이 있는 생활 같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언제 해고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한국의 직장인들이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반에 명예퇴직으로 밀려날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고통받는다면, 미국의 직장인들은 내일 아침 회사 정문에서 출입증이 작동 안 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고통받는다. 직장생활이 팍팍하고 힘에 부치는 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