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장군은 경상우도순찰사 김수에게 청하여 수군으로 장군이 맡아서 적의 도망할 길을 막아 적의 책원지(策源地=부대에 보급, 정비, 위생 따위의 병참지원을 행하는 후방기지)인 부산을 무찌르자고 하였습니다. 경상도내에 있는 의병이라도 각처에 상당히 많으니 관찰사의 호소로 지휘하여 전쟁에 나가도록 하였으나 원래 김수는 지난 4월 적병이 부산, 동래, 양산, 김해 등 큰 진을 불과 수일간에 함락시킬 때 겁을 집어먹고 진주성을 버리고 달아난 위인이었습니다. 이런 위인이 장군의 청을 들으매 자신은 없다하더라도 못한다 하기는 어려워 9월 1일을 기약하여 부산의 적 소굴을 수군과 육군이 서로 응하여 협공하기를 굳게 약속하였습니다.”

“음! 이때에 장군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와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과 서로 약속하고 8월 초하루에 전라좌우도 병선을 합하여 대선 74척, 협선 92척 모두 합해 166척(그간에 장군의 병선을 50척이나 지었다.)을 거느리고 전라좌수영 앞바다에서 대 관함식을 열어 함대 연습을 하며 전쟁실습을 하고 있었다.”

“네, 이런 때에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로부터 관문이 왔는데 내용은

‘위로 침범한 적도들이 낮에는 숨고 밤에 행군하여 양산, 김해강 등지로 연이어 내려와 짐을 가득 실은 것이 도망하려는 기미가 분명하다.’

라는 구절이 있어서 곧 출동하기를 재촉한 뜻이었습니다.”

“음! 김수의 관문의 뜻은 경성 이북으로 갔던 적도들이 낮에는 숨고, 밤에는 길을 재촉하여 양산과 김해 등 강으로 연속하여 내려오는데 싣는 짐이 많은 것을 보면, 필시 도망하여 돌아오는 모양이라는 뜻이다.”

 

1592년 9월 29일, 팔월 스무나흘, 辛亥일의 난중일기

“난중일기 중에 유월 열하루부터 팔월 스무사흘까지 73일이 빠졌습니다. 이는 전쟁이 너무 급하게 돌아가는 기간이었기에 못썼을 것입니다.”

“그렇다. 이순신세가의 기록에 의하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에서 67여척을 격파하고, 팔월 열엿새에 자헌대부로 승자하셨고, 한산대첩(견내량) 및 안골포에서 왜선 79여척을 격파하여(정헌대부로 승자) 일기를 쓸 시간이 없었을 것으로 본다.”

“네, 1592년 9월 29일, 팔월 스무나흘, 己酉월 辛亥일은 劫財가 亥(수)식신을 대동한 날입니다. 날씨는 맑았고, 객사 동헌에서 정영공(丁令公, 정걸丁傑=영공令公=이조 때 당상의 벼슬을 한 사람에게 쓰는 존칭임)과 아침밥을 같이 먹고 곧 침벽정(浸碧亭)으로 옮겼다. 우수사(이억기)와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정조방(丁助防)도 함께 했다. 丙申時(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 출발, 노질을 재촉하여 노량 뒷바다에 이르러 닻을 내렸습니다. 다시 삼경(三更=자정 무렵)에 달빛을 타고 행선하여 사천 모사랑포(毛思郞浦)에 이르니 날은 벌써 샜지만 새벽안개가 사방에 끼어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1592년 9월 30일, 팔월 스무닷새, 壬子일로서 食神이 子(수)傷官흉신을 대동한 날로서 날씨는 맑고, 甲辰시(辰時=아침 7시에서 9시 사이)에 안개가 걷혔다. 삼천포(三千浦)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평산포 만호가 공장(公狀=수령이나 찰방(察訪)이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사(水使)들에게 공식으로 만날 때에 내는 관직명을 적은 편지)을 바쳤다. 거의 당포에 이르러 경상우수사(원균)와 배를 매고 서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戊申시에 당포에 도착하여 거기서 잤다. 밤이 이슥해서 비가 잠시 내렸다.”

“네, 1592년 10월 1일, 팔월 스무엿새, 癸丑일로서 傷官이 丑(토)正印을 대동한 날로서 맑았고, 견내량(見乃梁)에 이르러 배를 멈추고 우수사와 함께 이야기 했습니다. 순천(부사 권준)도 왔고, 저녁에 배를 옮겨 각호사(角呼寺=거제 땅) 앞바다에 이르러 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