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불거진 국정농단 사건으로 재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 오랫동안 재계를 대표하던 전국경제인연합은 사실상 해체수순을 밟았으며 한국경영자총협회도 정부와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박용만 회장의 대한상의가 일종의 재계 대표로 부상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기업도 풍파를 겪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삼성에 있었다. 재계 1위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와병 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야심차게 등판했으나 국정농단 사건에 휘말려 현재 구속수감된 상태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이 부회장에게 징역 12년을 구형한 상태에서 25일 1심 선고를 남겨두고 있다. 삼성 미래전략실은 해체됐고 수뇌부도 법의 심판대에 섰다. 롯데도 마찬가지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공판이 진행중이다.

이렇듯 비선실세가 재계에 남긴 상처가 여전한 상태에서, 최근 최태원 SK 회장의 굵직굵직한 행보가 재계에서 새삼 이슈가 되고 있다. 비선실세 논란과 각 그룹의 세대교체가 맞물리며 최태원 회장이 가진 재계에서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평가다.

정의선 부회장이 서서히 전면에 나서고 있는 현대차와 구본무 회장을 대신해 그룹의 대소사를 챙기기 시작한 구본준 부회장이 LG의 핵심으로 나아가는 장면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비선실세 논란이 재계 전반을 휘감은 상태에서 이와 별도로 각 주요그룹의 세대교체 움직임이 일면서, 최태원 회장이 ‘현역’으로서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재계 전반의 굵직굵직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최태원 회장은 삼성이 비선실세 논란의 직격탄을 맞은 상태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그 즉시 일본으로 날아가 도시바 인수전을 현장지휘하기도 했다. 이후 주요 그룹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숨 고르기에 돌입한 상태에서도 뜨거운 화두를 던지며 재계 전반의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문재인 대통령의 첫 방미기간을 함께했던 경제인 사절단 면면에서도 재차 확인된 바 있다. 당시 경제인단에 참석했던 최태원 회장은 국내 4대 그룹 중 유일한 현역 오너로 꼽혔기 때문이다. 삼성은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이, 현대차는 정의선 부회장이, LG는 구본준 LG그룹 부회장이 이름을 올렸다.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이 ‘사람중심’으로 가닥이 잡힌 상태에서 최태원 회장의 SK가 이를 빠르게 체화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일단 SK브로드밴드는 그 어떤 ICT 기업보다 먼저 하청업체 설치기사를 자회사 직원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 SK 확대경영회의. 출처=SK

여기에 지난 7월 열렸던 SK 확대경영회의에서 나온 딥체인지(Deep Change) 2.0이 눈길을 끈다. 조대식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주재로 총 16개 주력 관계사 CEO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당시 회의에서 SK는 동반성장, 상생협력이라는 키워드를 자사는 물론 재계 전반에 던졌다.

나아가 SK는 2차, 3차 협력업체들과 상생 강화를 위해 전용펀드를 1600억원 규모로 조성하며 기존 4800억원 규모로 운영중이던 동반성장펀드는 1400억원 증액해 6200억원으로 늘리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상생협력안을 꺼내들기도 했다. 물론 다른 그룹도 비슷한 상생안을 발표했으나 SK 정도의 파괴력은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일각에서 오너를 중심으로 재계 전반에 일사분란한 ‘화두’를 던졌던 곳은 전통적으로 삼성이었으나, 이제 SK로 변하는 것 아닌가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21일 올해 처음으로 열린 제1회 이천포럼도 의미심장하다. 자사는 물론 재계 전반에 울림을 주는 이벤트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천포럼은 서울 광장동 워커힐 호텔과 경기도 이천시 SKMS연구소에서 ‘딥 체인지(Deep Change)의 이해’를 주제로 24일까지 열린다. 그룹의 비전은 물론, 이를 연계해 사회전반에 화두를 던지는 분위기다.

본 포럼은 아시아계 최초의 예일대 학장인 천명우 교수(신경과학)와 한국인 최초의 블룸버그 석좌교수인 하택집 존스홉킨스대 교수(물리학), 역시 한국인 최초의 하버드대 종신교수인 박홍근 교수(화학) 등 해외 대학에 재직 중인 유명 석학들이 강연자로 나선다. 또 ‘신경경제학의 개척자’로 불리는 이대열 예일대 교수(신경과학), 뇌과학 분야의 스타 학자인 이진형 스탠포드대 교수(생명공학), 미국 백악관이 ‘촉망받는 젊은 과학자’로 선정한 박지웅 시카고대 교수(화학) 등도 특별 초빙됐다.

▲ 제1회 이천포럼에 참석한 최태원 회장. 출처=SK

무엇보다 최태원 회장 본인이 직접 연사로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SK에 따르면 최태원 회장은 김용학 연세대 총장, 염재호 고려대 총장, 이재열 서울대 교수(사회학) 등과 함께 2시간동안 토론했다. 그는 토론회에서 “급변하는 시대에 심화하는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며 “제품과 서비스에 사회적 가치를 더하지 않고는 더 이상 생존이 어려운 시대”라고 말했다.

나아가 ”SK의 경우 통신ž정유에서 반도체로의 사업 진출을 확신하지 못한 구성원도 있었으나, 누군가의 확신과 앞 선 준비로 미래 먹거리를 만들고 있다”며 “미래에는 사회적 가치 창출이 존경 받고 사랑 받는 기업이 되는 원천이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SK는 이 같은 변화에 대비해 경영철학(SKMS)과 경영평가 항목에 ‘사회적 가치 창출’을 반영하고, ‘공유 인프라’ 개념을 도입 중이라고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최태원 회장은 스스로가 비선실세 논란을 피해간 상태에서, 최근 다른 재계 지도부가 여러가지 이유로 일종의 힘의 공백상태에 빠진 이 시점에 인상깊은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기업의 ‘사이즈’에 따른 우열은 분명하지만, 최태원 회장의 최근 행보가 재계에 상당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