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적 풍경, 360×160㎝ oil on canvas, 2001

 

이번 신작에서 가장 큰 변화라면 그 여행에서 돌아 온 그의 흔적이다. 흰 천으로 덮인 채 떠나버린 화가를 기다리다 돌로 굳은 듯 거대하기만 하던 의자에서 천이 거두어 지고 밀짚모자가 놓이고 옷이 걸리는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뿐이라고 했던가! 이러한 의자의 변화에서는 그 긴 여행에서 돌아와 여독을 풀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여유 있는 모습이 느껴진다.

 

▲ 서정적 풍경, 194×97㎝ oil on canvas, 2001

 

그래서일까? 날카로운 금속성의 시계바늘이 사라지고 이를 대신하듯 두 송이 꽃이 나비처럼 내려앉는 작품에선 자연과 기계, 이성과 본능이 하나로 통합된 세계가 엿보인다. 한편 이번 신작에서 지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변화는 그가 거부했던 현실과 인간이 다시 긍정적 가치를 회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000호를 훌쩍 넘기는 대작인 ‘타임’과 ‘일상-도시’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 타임, 727.2×227㎝ oil on canvas, 2001

 

나신의 군상들이 쓰고 있는 탈과 구겨진 시계판은 인간의 허영, 이기심, 위선 등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들을 등지고 거대한 시계를 관조하는 화가의 뒷모습에는 이전과는 달리 선과 악, 이성과 본능이라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긍정의 태도가 엿보인다. 한편 텅 빈 도시의 거리와 콘테이너 건물이 등장하는 작품은 상상의 여행을 위해서 반드시 자연의 이미지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 도시풍경, 582×218㎝ oil on canvas, 2001

 

콘테이너 건물 안에 갇힌 시계와 빨간 신호등이 암시하듯 이 거리는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멈춰진 시간으로 인해 초월성이 암시된 공간이다. 코믹한 느낌을 주는 모형비행기는 이전의 작품에서 기차, 말, 낙엽이 했던 역할 즉 상상의 여행수단이자 도심의 공간에 초월성을 부여하는 징표이다.

이석주(ARTIST LEE SUK JU, 李石柱)작가는 이제 도심 한복판에 있는 콘테이너 앞의 의자에 앉아 또 다른 여행을 꿈꾸고 있는 듯하다. 이번 신작은 그 여정이 선과 악, 빛과 어둠,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통합된 세계일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글=정무정(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