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리컵의 허전한 오후, 65.1×50.0㎝ acrylic on canvas, 1984

 

1984년. 나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의 ‘1984’라는 소설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감시가 지배하고 조직된 것들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통제되어지는 전체주의 국가. 가상의 빅브라더(big brother)를 통하여 사상을 통제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실은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은 시대에 힘겹게 살아나가고 있다는 당시의 자괴감은 아무런 죄가 없는 전경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으로 해결되고 있었다.

그러다 군대를 다녀와서 아버지의 갑작스런 병으로 가세는 기울었다. 누워계신 아버지를 보기 힘들어 나는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선배가 하는 술집에서 잠을 잘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학교 실기 실에 늦게까지 있다가 가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의자를 붙여놓고 잠을 잤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전날에 취객들이 어질러 놓은 찌든 안주와 맥주 거품을 지워 내며 청소를 하고 학교에 등교하는 고단한 인생을 살았어도 단 한 번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버린 적이 없었다.

 

▲ 남한산성 산책 중인 이두섭(ARTIST LEE DOO SEOP)작가

 

선배의 술집은 손님들이 늦게 오는 곳이라 낮에는 한가했다. 청소를 마치고 그날따라 학교를 가지 않는 날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공간이 무척이나 퇴폐하게 느껴졌다. 그 전날 그곳에 앉아있던 커플들은 몹시도 취했고 그들의 행동은 참으로 과감하였다. 아마도 시간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뇌에 씨앗이 내리면 그 식물이 자랄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생겨 그것을 그려 보기로 작정하였다. 집중하여 반나절 걸려 완성하였다. 당시 상황이 좋진 않아 포장하여 깊은 곳에 감추어 두었다.

애매하고 또 애매한, 웃는 듯 안 웃는 듯, 탐욕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욕심을 버린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정의내릴 수 없는 표정이 이 그림의 중요 키워드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뇌 속에 심어져 뇌수를 양분삼아 자라나고 있는 하나의 식물이 갖는 호러(horror)적 서스펜스를 상쇄하려 의도했기 때문이다. 그 불안한 공기를 깨뜨리는 파랑새의 날갯짓은 자유에 대한 열망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