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이 예전같지 않다는 말이 나옵니다. 몸집은 커지고 있으나 확실한 한 방이 없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일본동화협회의 자료를 인용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일본 애니메이션 자료 보고서를 보면 2002년 1조948억엔에 달하던 일본 애니 시장은 점점 확장되어 2008년 1조3798억엔을 찍습니다. 2009년 1조2523억엔으로 살짝 주춤하나 싶었지만 다시 확장을 거듭, 2015년에는 1조8255억엔으로 올라갑니다. 그렇다면 시장의 활성화 척도를 볼 수 있는 애니 타이틀 숫자를 보겠습니다. 신작 타이틀 수 기준 1991년 48개에서 1999년 103개로 최초 100개 고지를 넘겼습니다. 2015년에는 무려 233개에 달합니다.

시장의 상황을 보면 일본 애니 시장이 축소되고 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성장세를 봐도 무난한 수준입니다. 글로벌 시장 영향력 분포를 봐도 상당히 고른 분포를 가지고 있어요. 아시아에서만 절대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K-팝과는 다른 매력이네요. ‘포켓몬고’의 세계적인 흥행을 설명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콘텐츠 침체기, 플랫폼이 답이다?

일본 애니의 역사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부분 1963년 <철완 아톰>을 시조로 봅니다. 이후 업계 간판 중 하나인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노동조합 파업과 1973년에 벌어진 무시 프로덕션 파산으로 인해 시장이 재편되었고 1970년대부터 1980년대 2차 붐이 일어났습니다. 이 시기에 애니 제작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현재까지 명성을 떨치고 있는 스튜디오 지브리 등이 등장해 장르의 다각화도 이뤄냈습니다.

1990년대 이후로는 대흥행시대입니다. <에반게리온>, <코난>, <공각기동대>, <바람의검심> 등 다양한 일본 애니가 파도처럼 몰아치며 소위 황금기를 구가합니다. 제작 시스템이 갖춰지기 시작하고 본격적인 시장이 형성되는 시절이기도 해요. 명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며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이 나왔던 것도 이 시기입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에 들어 암흑기가 시작되고 합니다. 작가의 질적 하락, 세대 교체의 실패에 따른 전반적인 시장의 후퇴와 더불어 1990년대 후반부터 극단적으로 갈리기 시작한 시청자 층의 거리가 멀어진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실제로 아동물에서 어른까지 아우르는 작품을 만들어 팬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에 성공했으나 이후 시장이 어려워지자 소위 오타쿠 중심의 전략을 펴는 쪽과 범용 팬을 노리는 작품들이 갈렸고, 특히 전자에 시선이 집중된 쪽은 작품의 질을 제고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일본 경제의 위축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악순환입니다. 제작사 사정이 좋아지지 않으니 작품의 질보다 2차, 3차 판매에 집중하기 위해 소위 오타쿠 시장만 파고들었고, 일본 애니의 황금기는 좁아지는 시장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논리입니다.

▲ 철완 아톰. 출처=픽사베이

넷플릭스가 손을 내밀다

2017년 8월2일, 넷플릭스는 일본 도쿄에서 넷플릭스 ‘아니메 슬레이트’를 열었습니다. 여기에서 넷플릭스는 일본 애니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합니다. 나아가 투자를 바탕으로 넷플릭스 플랫폼에 일본 애니를 담아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뜻도 밝힙니다.

사실 지난 3월 이미 예고가 행보이기도 합니다. 당시 열렸던 아니메재팬 2017에서 <설하의 맹세>, <진격의 거인 시즌2>, <아톰 더 비기닝> 등이 연이어 서비스 소식을 알린 상태에서 페이트 시리즈의 시즌오프인 <페이트 아포크리파>가 넷플릭스 플랫폼을 타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행보입니다.

사실 넷플릭스는 글로벌 진출 전인 지난해 초보다 앞서는 2015년 3분기, 일본에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행보를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공격적인 투자도 없었고 차별적인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업계에서는 넷플릭스가 아시아 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일본을 지정했을 뿐, 주 관심은 거대한 내수시장의 중국을 향해있다고 추정했습니다.

당시 넷플릭스는 안방인 미국시장에서 누적 가입자가 2015년 3분기 기준 4318만명이었습니다. 2014년 3911만명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성장세가 크게 둔화된 상태였습니다. 결국 신규 가입자를 확보하려면 글로벌 무대로 나가야 하고, 그 핵심은 중국이라는 결론이에요. 여기에는 넷플릭스 입장에서 일본이 중국으로 가기 위한 발판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중국에 대한 넷플릭스의 구애가 상당한 지점도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였습니다. 지난해 초 넷플릭스 글로벌 진출 당시 중국은 빠진 상태였습니다. 다양한 규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리드 헤이팅스 넷플릭스 CEO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며 문제를 풀기 위해 중국 광전총국(SARFT)과 협의 중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 리드 헤이팅스 넷플릭스 CEO. 출처=넷플릭스

일본 미디어 시장의 특성도 넷플릭스가 힘을 쓰지 못한 배경으로 거론되었습니다. 콘텐츠 강국인 일본에서 적절한 현지화 정책을 펼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본의 국내 모바일 게임 시장 연착륙 실패사례와 닮아있다는 생각과 이어졌어요. 막강한 기술력과 콘텐츠를 선봉에 세우면 ‘무작정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맹신’입니다. 여기에 유료방송 가입료가 비싼 미국과 다른 아시아의 상황을 오판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넷플릭스는 일본 시장을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마존 이커머스 전략과 비슷한 방식으로 나섰어요.

약간 다른 말이지만 아마존이 이커머스로 국내에 진출할까요? 많은 전문가들은 어렵다고 봅니다. 다만 국내 콘텐츠를 ‘소싱’해 자신의 플랫폼에 실어 글로벌 전략을 추구하는 것에는 매우 관심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넷플릭스도 일본에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고른 팬층을 가진 일본 애니의 저력을 충분히 활용하는 전략입니다.

넷플릭스가 부상한 계기는 ICT 콘텐츠 큐레이션 기능과 오리지널 콘텐츠로 볼 수 있습니다. 최근 다운로드까지 하고 있으나 일단은 콘텐츠 파워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일본 애니 콘텐츠를 낙점하고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해 자사 플랫폼을 강화하고, 이를 로컬전략으로 묶어내는 방식입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넷플릭스는 일본 애니에 대한 투자를 단행, 자신의 플랫폼에 태워 세계로 뻗치게 만듭니다. 어떻게 될까요? 콘텐츠의 매력이 고스란히 플랫폼의 경쟁력이 됩니다. 다음은 로컬전략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인 <나르코스>는 영어가 아닌 남미언어로 만들어 졌습니다. ‘전설적인 남미 마약왕의 일대기’라는 매력적인 콘텐츠를 넷플릭스에서 만들어 글로벌 시장에 뿌렸고, 시리즈는 대성공했습니다. 그렇다면 남미 사람들은 어떨까요? 처음에는 신기해서, 다음으로는 보기 편하기 때문에 <나르코스>에 더 몰입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옥자는 한국어로 촬영이 되었어요. 영어도 나오지만 한국어도 비중있게 나옵니다. 콘텐츠 매력이 있는 곳에 엄청난 투자를 단행해 글로벌 플랫폼인 넷플릭스에 태우고, 이를 다시 로컬전략으로 풀어가는 것은 넷플릭스 특유의 플랫폼 운용 기술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 영화 <옥자> 포스터. 출처=넷플릭스

마냥 웃기에는 씁쓸하다

넷플릭스는 영화 <옥자>에 제작비 5000만달러 전액을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애니에도 막강한 규모의 경제를 보여주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그런 이유로 전문가들은 넷플릭스의 로컬전략과 플랫폼 강화의 연장선에서 특정 지역의 콘텐츠 시장이 황금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등장으로 콘텐츠 시장이 화려한 비상을 시작한다고 해도, 뭔가 씁쓸한 뒷맛은 납니다. 바로 콘텐츠와 플랫폼의 상관관계입니다.

콘텐츠와 플랫폼의 상관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언론사와 포털의 관계입니다. 원래 언론사는 콘텐츠 제작과 플랫폼 기능을 모두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포털에게 플랫폼 기능을 흡수당하고 맙니다. 물론 '콘텐츠가 왕이다. 그리고 플랫폼의 경쟁력은 콘텐츠가 정한다'는 일종의 진리입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역학관계를 보면 이미 다양한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플랫폼이 콘텐츠 결정권을 가지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아쉬우면 콘텐츠가 방향성을 정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플랫폼 사업자는 일반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콘텐츠 사업자보다 규모의 경제를 더욱 쉽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이유입니다.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로컬전략까지 구사하는 넷플릭스가 특정 시장의 콘텐츠 경쟁력을 선택하는 순간. 현지 시장은 일종의 종속관계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넷플릭스가 어떤 플랫폼 사업자입니까.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을 통해 콘텐츠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아요. 이는 엄청난 무기입니다. 최근 넷플릭스가 디즈니와 결별하고, 디즈니가 자체 스트리밍 플랫폼을 구축한다고 하는데 많은 전문가들은 디즈니가 넷플릭스를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디즈니 콘텐츠는 훌륭하지만 일단 한정적이고, 무엇보다 넷플릭스는 콘텐츠와 플랫폼 모두 강력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미래에 대한 가정이 필요합니다. 넷플릭스가 일본 애니에 투자를 강화해 자사 플랫폼으로 끌어들여 로컬전략과 글로벌 전략을 동시에 실시한다면? 콘텐츠 제작사는 좋습니다. 돈이 들어오고 좋은 자원이 생태계로 편입되기 때문입니다. 또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플랫폼이 생기니 파급력도 강해집니다. 일본 애니의 경우 1990년대 황금기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간다면 지금의 언론사와 포털 관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플랫폼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콘텐츠 사업자는 운신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발전해 콘텐츠 제작사가 다양한 포맷 실험을 거듭하려고 해도 넷플릭스의 방식에 맞지 않으면 빛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마치 언론사가 포털에 뉴스를 송고할 때, 외부링크 삽입에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나중에 수익성 문제와도 직결되어 엄청난 리스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넷플릭스를 내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나라가 있지만, 정치 체계가 사회주의가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어려운 데다 방대한 내수시장을 가지지 못했다면 버티기도 어렵습니다. 또 언제까지 막아낼 수 있을까요? 정부가 법으로 규제하는 방법이 있겠죠. 하지만 그 자체가 트렌드 고립이 될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대응 방식은 넷플릭스 정도의 플랫폼을 키워내는 겁니다. 그러나 단숨에 한국형 넷플릭스를 만들 수 없습니다. 차선책은 콘텐츠 능력을 더욱 키워 플랫폼의 규제에서 목소리를 키우는 방법이 있겠네요. 그러나 이건 단기간에 이룰 수 없는 방법이며 지독한 인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회문화의 패러다임을 두고 콘텐츠 시장을 키우고, 플랫폼까지 ‘최정상급’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플랫폼 이미지. 출처=픽사베이

콘텐츠 집결지는 어떨까

사사키 도시나오가 쓴 <큐레이션의 시대>라는 책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제 콘텐츠를 잘 만드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얼마나 잘 큐레이션 하는 것인가가 관건이다'입니다. 그런데 최근 미디어 시장에는 1인 크리에이터 중심의 MCN을 중심으로 '콘텐츠가 왕이다. 이제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문제다'라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연결고리가 보이시나요? 시기적으로 가면 '(1단계)콘텐츠가 왕이라는 전제-(2단계)콘텐츠를 잘 만드는 법을 고민해야 한다-(3단계)콘텐츠를어떻게 큐레이션 하는가'로 이어집니다. <큐레이션의 시대>는 3단계이고 지금 미디어 시장에서 말하는 것은 2단계입니다.

큐레이션의 시대에서 말하는 콘텐츠는 뉴미디어와 관련이 없는 일반적인 상품 등의 콘텐츠에요. 이를 넷플릭스의 사례와 비교하면 현실적인 교집합은 찾아보기 어려워도, 현존하는 모든 콘텐츠와 플랫폼 시장은 동일한 고민을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힌트가 있지 않을까요? <큐레이션의 시대> 말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정보는 비오톱으로 흘러들어 세계로 나아간다'. 여기서 말하는 비오톱은 생물군집 서식공간을 뜻하는데, 일종의 콘텐츠 집결지를 말합니다.

넷플릭스와 일본 애니, 그리고 콘텐츠와 플랫폼의 상관관계에서 비오톱은 무엇을 뜻할까요? 시장의 확장으로 콘텐츠 역량이 모이는, 플랫폼 진출 전의 또 다른 집합체에 대한 고민을 한 번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지나치게 자의적 해석이지만 콘텐츠와 큐레이션의 간격을 좁히고 이를 플랫폼에 수급하는 문제를 재정의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최소한 글로벌 플랫폼과의 전쟁에서는 의미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여기에는 콘텐츠 경쟁력이 우수해야 하며, 관련 시장이 유기적으로 외부이슈에 대응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다양한 고민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IT여담은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소소한 현실, 그리고 생각을 모으고 정리하는 자유로운 코너입니다. 기사로 쓰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한 번은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를 편안하게 풀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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