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투기와 주택시장 불법행위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경고로 대한민국은 ‘투기세력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투기세력’으로 단속 대상을 특정함으로써 ‘나쁜 세력’이 누구인지는 정리가 끝났다. 다주택자다. 하지만 이 지경까지 오게 한 ‘무능한 세력’은 어디 갔는가. 시중에서는 “정책 당국자들 중에도 다주택자가 있는 것 아닌가”라고 비아냥댈 만큼 그들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빚을 내서 집을 사라’고 한 최경환 국회의원은 건재하고, 건전성 기준만 갖추면 어디에 대출하든지 상관없다고 방치한 감독당국도 사과한 적이 없다. 금리 올리면 부채 많은 저소득층만 죽어난다며 ‘학자적’ 진단만 해댄 한국은행은 여전히 국외자다.

수십 페이지 되는 부동산 대책 발표문을 아무리 뒤져봐도 책임을 통감한다는 자성 한 마디가 없다. 이 무능도 박근혜 몫인가. 오로지 ‘나쁜 세력’을 크게 부각하는 것으로 상황을 덮어갈 뿐이다.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급등하는 부동산 가격을 잡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때는 지금과 좀 달랐다. 그때 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그때도 참여정부 부동산정책을 지휘하던 이는 김수현 청와대 사회정책수석(현재 대통령비서실 사회수석)이었다. 2006년 11월 6일 김 비서관이 한국은행 본관을 들어서려다 <이데일리>의 한은기자 눈에 포착됐다.

‘왜 왔을까’를 깊이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참모들이 연일 투기세력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당시 청와대 브리핑에는 ‘유동성을 잡아야 한다’는 글이 쏟아져나왔다. 한국은행이 나설 때라는 목소리였다.

방문 소식이 알려지자 채권시장이 요동쳤다. 3일 뒤 열리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를 앞두고 김 비서관이 이성태 한은 총재를 방문했으니, 콜금리 인상은 자명해보였던 것이다(김 비서관은 방문 이유가 콜금리 인상 요청이 아니라 사적인 이유였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3일 뒤 한은 금통위는 콜금리 동결을 결정해버렸다. 이렇게 결정한 이유가 경기판단이 아니라, “그날 방문이 한은의 독립성을 해쳤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며 버틴 것이 가관이었다. 당시 한국은행의 독립성이 정권 차원에서 고심하던 부동산 안정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을 한 셈이다.

2017년 승진한 김 수석은 왜 한은에 협조하러 가지 않았을까. 한국은행의 독립성이 자명해 정책협조를 구하러 가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받을까 의식한 것일까. 청와대는 대통령이 피자 쏘겠다는 약속까지 걸며 대기업 총수들에게 부동산 안정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하는데, 정작 중요한 통화당국의 수장인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에게는 처방을 묻거나 ‘유동성을 잡아달라’는 협조 요청을 하지 않았다. 한은의 존재감이 약화된 탓으로 비쳐질 뿐이다.

부동산자산버블을 가라앉히는 데 한은의 역할을 찾는 것이 견강부회일 수 있다. 한은의 주요 통화정책인 금리정책은 모든 국민들에게 미치는 광범위하며 강력한 정책이어서, 자칫 가계부채 부작용을 더 키우거나, 성장엔진 약화로 고심하는 우리 경제를 더 짓누를 수 있다. 소총 쏴서 잡아야 할 일에 대포를 쏘는 격이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전설적인 중앙은행 총재였던 앨런 그린스펀을 하루아침에 몰락하게 만든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 전후 상황을 떠올린다면,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해 제한적인 생각에 머물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그린스펀은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의 브룩슬린 본 위원장과 파생상품 규제를 놓고 ‘전설적인 전투’에서 힘겹게 이겼지만, 그 사태 이후 전개된 금융위기로 모든 오욕을 다 뒤집어써야 했다. 그는 낙관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파생상품규제도 반대했고, 부동산자산버블에 대한 경계도 간과했다. 한국은행은 작게는 어떤 조치를 창안하거나, 크게는 돈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로잡는 정책을 폈어야 했다.

부동산자산버블이라고까지 할 수 없다곤 하더라도 이 같은 집값 급등이 왜 생겨났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 1998년 IMF위기를 겪은 후, 정부는 물론 통화당국인 한은까지 정책 방향을 금융산업의 건전성 제고에 집중해왔다. 무슨 재주로 돈을 벌든 간에, 이익을 많이 남겨서 건정성 지표만 개선시키길 바랐다. 다시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은행은 떼일 걱정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기업여신이 아니라, 담보가 있는 부동산 대출임을 알고 여기로 내달렸다. 통화가 어디로 흘러가야 좋을지, 즉 좋은 통화는 무엇인지 방향을 제시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신 자율화’라는 규제완화는 금융산업과 가계경제를 ‘살찐 돼지’로 키웠고, 생산현장에선 새로운 기술과 혁신아이디어는 외면받았다.

한은은 과거에 여심심사규정을 두고 있었다. ‘최후의 안식처’ 역할인 한은은 최초 통화공급원으로서 시중은행들에게 불건전한 시설투자 대출을 제한하며 생산적인 투자를 유도하곤 했다. 지금 와서 본다면 서민 실수요자를 위한 대출, 기술혁신 기업이나 스타트업 기업에 대한 자금대출을 시중은행들에 유도하는 조치를 펼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아쉽다.

부동산정책뿐만 아니다. 우리 경제가 맞고 있는 불안한 상황은 정부 일개 부처나 통화당국에만 맡기엔 역부족인 것들이 많아졌다. 예를 들어 저출산 고령화 문제, 일자리 창출문제, 미래 4차산업혁명을 이끌 신산업 발굴 등이다. 여기엔 정부 부처와 독립된 한국은행 등이 따로따로 움직일 일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밀실에서 결정하는 서별관회의가 있어서 큰 경제정책을 조율했다. 밀실에서 이뤄지다 보니 책임소재가 불분명하고 불법시비까지 일었다.

공개적으로 운영하는 경제정책협의회, 또는 최소한 금융안정협의회 같은 범정부적인 협의기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 안에는 중앙은행도 존재감을 찾아 한국 경제의 안전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지난 7월 후보자로서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서별관회의와 같이 당사자까지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