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국민소득 1위 룩셈부르크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강소국 벨기에가 우리의 비교대상이 되고 있다. 인구는 남한의 4분1 수준이지만 강대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가 비슷하고 자원빈국이며 GDP(국민총소득)에서 차지하는 수출 비중이 높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또 대륙안에 교통의 요지로 주변 강국의 침략이 잦았다는 것도 중국 과 일본, 몽고 등의 침탈이 많았던 우리의 역사와 비슷하다.

벨기에의 최근 1인당 국민소득은 4만여 달러로 우리보다 1만여달러 앞서 있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강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작은 나라 벨기에가 잘사는 이유를 살펴봤다.  

우리는 유럽의 벨기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국 축구 국가 대표팀이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만난 나라? 에당 아자르의 나라? 초콜릿과 맥주의 나라?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바로 '우리가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하고 있다. 서유럽의 부국 벨기에,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와 함께 베네룩스 3국으로 묶여 묘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참 팍팍하게 살아온 나라. 벨기에는 우리의 롤모델은 아닐 수 1인당 소득 3만달러시대를 앞두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나라다.

▲ 브뤼셀 시내. 출처=위키미디어

유럽의 중심, 최대한 활용한다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달 20일(현지시간) 유럽에서 열린 플레이북 조찬행사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보호 무역주의의 폐혜를 우려했다.

세실리아 말름스트롬(Cecilia Malmstrom) EU 집행위 통상부 집행위원을 비롯해 EU 의회측 통상, 고용, 연구혁신, 국제관계 등의 관련 인사들과 싱크탱크, 주요 기업 관계자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권 부회장은 지속적인 기술의 발전과 혁신으로 첨단기업들의 IT 생태계가 이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권 부회장은 "지난 10년간 글로벌 기업들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불확실성에 직면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 도태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며 "글로벌 보호무역주의는 기업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권 부회장의 발언은 지난해 브렉시트 여파와 올해 초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출범으로 보호 무역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한 현재의 상황을 경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나아가 그의 발언이 경제 개방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유럽의 중심,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나왔다는 점도 묘한 울림을 남긴다. 브뤼셀에는 유럽연합의 본부가 위치해 있다.

▲ 권오현 부회장. 출처=삼성전자

벨기에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58년,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가 켈트족의 일파인 벨가이 족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처음이다. 로마가 멸망한 후에는 샤를마뉴의 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어 상당한 부를 쌓았다는 기록도 나온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상공업 발달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교통의 요지란 곧 강대국의 침략 루트라는 전제가 깔린다. 이내 벨기에는 인접국 네덜란드와 치열한 투쟁과 합병을 반복하는 상황에서 1568년 80년 전쟁, 1714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줄줄이 휘말리며 신음하게 된다.

1831년 간신히 레오폴드 1세의 손에 의해 독립국가를 세우며 이후 아프리카의 콩고를 식민지로 삼는 등 제국주의 흉내를 잠시 냈으나 이내 1차, 2차 세계대전의 주요전장으로 전락하며 온 국토가 완전히 피폐해진다. 다만 1918년 왕위에 오른 레오폴드 3세가 급격한 산업화와 사회개혁에 성공하며 다행히 서유럽 부국의 초석을 마련하게 된다. 이후 주변 강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등거리외교' 전략은 프랑스가 독일 눈치를 보고 독일이 네덜란드 눈치를 보며 침략을 자제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벨기에가 독립을 지키며 경제자립을 이뤄 선진국 대열에 합류 할 수 있었던 것은 '등거리외교' 전략의 결과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이런 부분이 소위 G2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사이에 있는 한국이 눈여겨 봐야할 대목이다.   

벨기에의 인구는 1100만명 수준이며 국토의 크기는 경상도와 비슷한 30,528㎢에 불과하다.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4만692달러(올해 4월말 IMF발표기준)에 달해 세계 21위에 이름을 올렸다. 명목기준으로 보면 4627억달러 수준이라 1조4981억달러인 한국과 비교해 낮지만 국토의 크기와 인구수로 보면 상당한 저력을 가진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카이사르부터 독일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외세의 침입을 당하면서도 현재의 벨기에가 서유럽의 부국으로 자리매김한 저력은 무엇일까? 벨기에는 교통의 요지라 전통적으로 상공업이 발달했으나 다른 강대국과 달리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에는 부족했고 석탄을 제외하고는 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다.

먼저 '속도와 개방성'이다. 속도부터 보자. 인류의 역사를 바꾼 1차 산업혁명의 고향이 영국이라는 것은 상식이지만 벨기에가 영국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산업혁명을 이룬 나라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사실이다. 벨기에는 인접국인 독일과 프랑스, 네덜란드를 연결하는 지리적 강점을 최대한 활용해 상공업을 일종의 기간 인프라로 설정한 상태에서 산업혁명의 깃발을 빠르게 올렸다. 프랑스와 독일보다 먼저 용광로 산업에 진출할 정도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도 남아 2013년 기준 벨기에의 산업구조에서 화학 분야가 20.6%에 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11년 외교부 자료에 따르면 벨기에는 전세계 1인당 플라스틱 생산량 646Kg을 기록해 133Kg의 프랑스, 67kg의 영국 등을 크게 앞선다.

개방성도 큰 무기다. 유럽연합의 본부가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무역과 외국인 투자유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으며 국내총생산 중 상품과 서비스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89%에 달한다. 이를 바탕으로 벨기에는 유럽 물류사업의 허브로 작동하기도 한다. 영국 남부에서 이탈리아 북부까지 이어지는 유럽 중부 물류벨트의 중심에서 큰 활약을 펼치고 있다. 세계선사협의회(World Shipping Council)에 따르면 2013년 기준 벨기에 앤트워프 항구는 세계 15위 무역항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 6월 벨기에 정부가 한국 핀테크 스타트업의 현지 진출을 돕겠다고 나선 배경에는 유럽 교통의 요충지이자 개방성의 나라라는 자신감이 배어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벨기에 투자청은 한국 핀테크 기업의 벨기에 진출을 돕는다면서 1년간 무료로 쓸 수 있는 사무공간과 사무기기는 물론 사업장 주소지를 제공하는 한편 각 기업의 투자금액에 근거한 이자는 법인세에서 원천 차감해주는 파격적인 약속을 하기도 했다.

지난 6월10일에는 벨기에의 아스트리트 공주가 이끄는 경제사절단이 한국을 찾아 따로 시간을 내어 국내 ICT 관계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틈새전략'도 적절했다. 벨기에의 앤트워프 항구는 세계 다이아몬드 원석의 80%가 거쳐가는 곳이고 제약산업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인구당 임상시험 수 세계 1위, 제약분야 연구개발에 매년 약 2조원을 투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화학산업이 발전하며 자연스럽게 제약산업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또 평지가 많은 국토의 특성상 부가가치가 높은 축산업을 중심으로 1차 산업을 키우고 있다. 공업을 중심으로 가공무역을 적극적으로 육성했으며 현재까지도 가공공업대국으로 평가받는다.

속도와 개방성, 틈새전략을 중심으로 ICT 기술에도 관심이 많다. 다만 기본적인 제조업을 중심에 두고 ICT 기술을 키운다는 점에서 룩셈부르크와 같은 강소국의 전략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지난 6월 장 클로드 마르쿠르 벨기에 왈로니아 부총리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현지 스타트업 소카벨렉은 유리병 생산라인에 윤활유를 정교하게 공급하는 스와빙 로봇을 최초로 개발한 곳이다. 핀테크와 같은 소프트웨어에 치우친 ICT 기술보다 하드웨어에 중심을 두고 초연결 시대를 준비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 브뤼셀에 위치한 유럽연합 본부. 출처=위키미디어

빛과 그림자
지금의 벨기에는 속도와 개방성, 그리고 틈새전략을 중심으로 ICT 기술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연장선으로 묶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서유럽의 부국이라는 명성을 쌓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벨기에가 여타 다른 나라처럼 우리의 완벽한 롤모델이 되기에는 2% 부족하다. 속도와 개방성, 그리고 틈새전략이라는 상대적 강점이 오히려 약점으로 작동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22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테러에 의한 폭발이 일어났다. 2015년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130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슬람국가의 다음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34명이 숨지고 200명이 부상당한 최악의 참사였다.

왜 브뤼셀이 공격을 받았을까? 벨기에 경제의 강점이기도 한 개방성에 단서가 있다. 벨기에는 많은 글로벌 기업을 유치하는 한편 다수의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그 과정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도 상대적으로 쉽게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미국 CIA는 당시 500명의 벨기에 국적자가 시리아와 이라크로 들어가 이슬람국가에 합류했고 그 중 100명이 벨기에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했다.

파리 테러의 주동자인 살라 압데슬람은 벨기에에 거주하기도 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 입장에서 개방의 나라 벨기에는 테러를 일으키기 적격이며 브뤼셀을 공격하는 것은 곧 유럽연합의 심장을 타격한다는 의미도 된다. 국제급진주의연구센터(ICSR)에 따르면 벨기에의 총 인구 대비 이슬람 성전 참전 비율은 100만명당 40명에 달해 유럽 최고수준이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은 벨기에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유럽연합 경제전망과 벨기에 중앙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벨기에는 3월 브뤼셀 테러, 그리고 하반기 일부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소비심리가 위축됨에 따라 경제성장률은 1.2%에 그쳤다. 소비, 투자 등 내수가 성장을 주도하는 가운데 순수출의 성장 기여도는 점차 축소되어 2018년에는 제로 수준으로 낮아진다는 우울한 전망도 나왔다.

▲ 벨기에 경제 2016년 동향 및 2017~18년 전망. 출처=코트라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벨기에는 지난 2010년부터 사상 초유의 무정부 상태를 경험하기도 했다. 네덜란드어 공동체와 프랑스어 공동체, 독일어 공동체로 나눠져 전국에 무려 7개의 의회가 등장하는 등 서로 으르렁거리더니 결국 2010년 6월13일 총선 직후 연정구성에 실패하자 무정부 상태에 돌입했다.

2011년 3월30일 무정부 상태 290일을 넘기며 종전 이라크 무정부 기록인 289일을 깼고, 화가 난 국민들은 분리독립과 정부 구성으로 팽팽하게 맞서며 감정의 골을 키웠다. 벨기에의 무정부 상태는 무려 541일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즉 벨기에는 개방성을 무기로 경제발전을 기민하게 끌었으나 복잡한 인구구성과 문화권의 차이로 지역분열이 심해 정치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곳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에 플란더스 지역이 GDP의 57%를 점유할 정도로 빈부격차도 심하고 공공기관의 부채도 2011년 기준 97.8%에 달하는 등 높은 편이다. 심지어 개방성의 기조는 대외무역의존도를 지나치게 높여 심각한 수준이라는 말도 나온다. 소규모개방경제(small open economy)의 전형이다.

▲ 벨기에 경제 2016년 동향 및 2017~18년 전망. 출처=코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기에는 1인당 국민소득 4만696달러에 빛나는 부국이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치적 불안정과 개방성이라는 양날의 칼을 체감하면서도 역사시대부터 이어온 중개무역의 전통과 현대의 ICT 기술을 접목하려는 노력에 답이 있다는 평가다.

한국무역협회는 벨기에의 경제를 두고 "외국투자에 대한 높은 의존도와 자체시장 협소로 인한 대외무역의 비중이 높아 대외경제 변화에 극히 취약한 경제구조"라면서도 "자원의 부족에도 불구, 일찍부터 자유무역과 외국인 투자유치를 통한 경제성장 정책을 추구했다"는 이율배반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결국 그 중심에서 '무엇이 더 좋은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